인물

기은棄隱 기의헌奇義獻<충신,의병>
정의 정신의 표상 “기은棄隱 기의헌奇義獻”


 기의헌(1587~1653)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의병. 자는 사직士直. 호는 기

은棄隱. 본관은 행주幸州. 아버지는 부사과로 이조참의에 추증된 효분孝

芬과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아들로 광주 소고룡면 고룡리(현. 임곡

면 고룡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복재 기준의 절의정신과 고봉의 학문적 유훈을 안

고 성장하여 경서經書에 조예가 깊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叔父인

곡성현감 기효전奇孝筌의 댁에서 자랐다. 25세 되던 1612년에 광주 조씨

廣州趙氏 조지기趙之麒 세 딸 중 장녀와 혼인을 하고 처가 동네인 광주

우치면 우점리(현. 광주 북구 효령동 종방 마을)로 장모인 의령 남씨의 재

산 관리를 위해 이주하였다.

1627년(인조 5) 강홍립姜弘立 한윤韓潤이 청나라 군사를 인도하여 침

입해 오자 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가 되어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

달하여 밤을 새워 달려갔으나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왕

세자를 전송하여 여산礪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또 거의도유사로 군사를 이끌고 청주까지

갔다가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을 해산하고 돌아왔다.

그는 호서·호남 의병을 지휘하던 사계 김장생의 부탁을 받아 광주지역

거의도유사로 활동을 했다. 이처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호남지방 의

병도유사를 마다하지 않은 것도 선현들이 가졌던 절의정신에 그 연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집안을 바로 하여야 한다는 사

실과 국가의 경영 또한 올바른 제가齊家를 통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

였다. 특히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와 범절, 가정에서의 효孝, 제弟,

자慈의 정신을 강조했다.

병자호란 후에는 은거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거처하는 집을 육오당六吾

堂이라 부르며 다음과 같이 삼언시를 지어 자기 뜻을 나타냈다.

육오당속제六吾堂俗諦 삼언시 6수를 보면

食吾食 나의 음식을 먹고, 飮吾泉 나의 샘물을 먹으며,

衣吾衣 나의 옷을 입고, 樂吾天 나의 천성을 지키며,

守吾命 나의 운명을 지키다가, 終吾年 나의 생애를 마치리라.

그는 자제들과 조카들을 모아 교육하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너희

들에게 소망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너희

에게 입신양명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장원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

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나를 봉양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어버이로서 자식을 사랑하며 동생으로서 형을 공

경하고 형은 동생들과 우애하며 부부는 서로 존경하며 공경하고, 임금에

충성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그 올바름을 행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면학설을 지어 자제들과 조카들에게 보여주다

면학설시자질勉學說示子姪이고, 가훈家訓이며 또한 사람다운 삶을 이루

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저서로 『기은유고棄隱遺稿』가 있다.

문집은 1905년 후손인 동로東老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최익현崔

益鉉과 그의 방손인 우만宇萬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그의 후손인 관현

觀鉉, 학현鶴鉉, 경섭景燮 등의 발문이 있다. 4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권

1에 시 14수, 권 2에 서書 1편, 권3에 설 2편, 서序 1편, 발 1편, 제문 2편,

도圖 1편, 권 4는 부록으로 가장, 행장, 비음기碑陰記, 묘표, 서술敍述, 묘

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출전 기은유고,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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