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의암義菴 김기명金基命<충신,의병>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임란 의병장 “의암義菴 김기명金基命”

 

  김기명(1540~1593)은 조선 중기의 무신·의병장. 자는 응여應汝. 호는 의

암義菴. 본관은 광산. 광주 북구 본촌동 옛 부동釜洞에서 참봉 김광헌金

光憲과 광산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 함경도 희천군수로 재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

발하자 임금이 도성을 떠나 의주로 피란하던 때, 희천에서 의병 천여명을

모집하여 평양성으로 진격하여 왜적을 공격하여 평양성 탈환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2월 권율도원수를 도와 행주대첩 전투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

다. 1593년 6월경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김천일 장군의 막하

로 성 안으로 들어가 부대장으로 적과 싸웠으나 우세한 왜군의 군세에 밀

려 패전이 불가피했다. 이때 최경회, 고종후, 황진 등과 끝까지 싸우다가

함락 직전에 성 아래의 남강에 투신해 순직했다. 그의 나이 54세 때였다.

1605년 조정에서는 그를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선 되고, 1623년에는

오위도총부경력五衛都摠府經歷을 추증했다. 현재는 진주성내 창열사와

충남 보령 호국사에 각각 그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곳의 충의비는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희천군수 김기명의 숭고

한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1961년 광산김씨 문중에 의해 광주광역

시 북구 본촌동 378-1번지(건국동사무소)에 세워졌다. 비의 규모는 높이

180cm, 폭 66cm 두께 33cm이다.

2004년 10월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그의 후손과 건국동 주민

자치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장군의 의기와 충절을 만대에 전하고자 낡은

담장을 허물고 새롭게 주변을 단장하게 되었다. 당시 명문장가인

춘광 노문영 선생은 장군의 충절을 “만약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백성을

배반한 자가 이 비를 쳐다본다면 두려움에 떨려 등에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라고

비문에 표현하여 극찬한 바있다.



출전 김기명실기,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호남절의록-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