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화암花菴 송타宋柁<충신,의병>
정유재란 때 왜적을 죽이고 돌아오다 순절한 “화암花菴 송타宋柁”


  송타(1567~1597)는 자는 시정時正. 호는 화암花菴. 본관은 홍주. 송

제민의 네 아들 중 첫째로 운암동에서 태어나 광주 북구 화암동에서 살

았다.

제봉 고경명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평소에 기질이 조용하면서도

품위가 있었으며, 몸은 깡마르고 허약하여 걸친 옷도 무거워 보이는 곧 하

나의 서생書生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수군으로 참전했는데 영산강 무안 경계인 사포나루

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는데 왜군에 사로잡혀

경상도 한산 해안에 이르렀을 무렵, 배 안에 왜인보다 우리나라 포로가 많

고, 배가 고립되어 인근에서 구원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배에 탄 포

로와 함께 왜장의 칼을 빼앗아 배 안에 있던 왜적을 모조리 베어 죽이고,

노를 저어 돌아오던 중, 칼에 맞아 바다로 떨어진 왜병이 헤엄쳐 달아나

고변하여 인근 왜선이 바다를 덮어 추격하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나는 광주에 사는 송제민의 아들인데 불행히 적에

게 붙들렸고 지금 또 불행히 죽게 되었다. 후일 여러분이 다행히 귀국하게

되면 부모님께 내 소식을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

했다. 그때 송타의 나이는 31세였다.

이러한 사실은 함께 붙잡혀 가던 창평의 진사 이신李愼이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에게 전하여 알려지게 되었는데, 4년이 지나 1600년

(선조 33) 강항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이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이를 명행기名行記에 기록하고 “아! 그는 어려움

에 부닥치어 틈을 노려 꾀를 내어 칼을 휘둘러 적을 무찌르고 마침내는

분명히 밝히고서 죽었으니, 열장부烈丈夫가 아니면 이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1788년(정조 12)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고, 운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상체찰사 이공 항복서, 광주읍지, 해광집, 홍주송씨 대동보, 수은집,

화암수록, 명행기.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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