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양성재養性齋 범진후范振厚<충신,의병>
병자호란때 광교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의병장 “양성재養性齋 범진후范振厚”


  범진후(1609~1671)는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군평君平. 호는 양성재

養性齋. 본관은 금성. 범우익의 맏아들로 임진왜란 의병장 범기생의 손자

다. 광주 북구 생용동 출신이다.

 5살에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일찍부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

장했다. 총명하고 무예도 뛰어나 김수금, 정대명 등과 어울렸으며,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성균관 생원에 응시해 합격했다. 이괄의 난 등 난세가 계속

되자 대과 응시를 포기하고 고향인 생용동에서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

란이 발발하자 복수를 다짐하며 주위 선비들과 병기, 군량을 모아 매달

15일 함께 무예를 연마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의 근왕교서가 내리자 400여 명

의 의병을 모아 전라 병사 김준용과 합세했다. 대장에는 김준용, 부장에

김수권, 우선봉장에 정대명, 그는 좌선봉장에 임무를 맡아 진군해 청주,

수원을 지나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진을 쳤다.

전라도 근와병勤王兵은 남한산성에 인근에 도착했다는 전령을 중앙군

에 보낸 뒤, 1637년 1월 29일부터 1월 31일까지 경기도 용인의 광교산 일

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에서 청나라 장수 양굴

리楊古利가 이끄는 청군과 싸워 병자호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혈전

끝에 양굴리와 그 부장 등 3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올린 전투였다. 그러나

이 싸움은 전라병사 김준용을 비롯하여 강진의 김수만, 김수권, 광주 사

람 허익복, 범진후, 충주 사람 김배, 정대명 등 후일 ‘육호장六虎將’이라 불

리는 이들이 한뜻이 되어 이룬 전과였으나 이를 시기한 전라감사 이시방

李時芳이 금전패禁戰牌를 보내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고의로 끊어

버려 광교산에서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은 뒤 광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으며, 조정

에서 여러 번 출사를 요청했으나 사양했다. 향리에 은거하고 평생 청나라

연호年號을 쓰지 않고, 1671년 7월 19일 61세로 사망했다.

후일 정조는 그를 공조참판에 추증했다.



출전 광주읍지, 남도 정자기행, 호남절의록.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