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처사,선비>
의리의 선비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



  고한주(1871~1959)는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자는 방서邦瑞. 호는 외당

畏堂. 본관은 장흥長興. 아버지 제인濟寅과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의

아들로 광주 북구 장등동 출신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도에 있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의 종지宗旨를 알고 이치理致를 깨우쳐 실천에 임

하였다. 이때 간재 선생은 고한주가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히 배운 것을 행

하는 것을 보고 외당畏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는 간재의 의리 정신과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계승하여 향리

에 은거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나가며 후학을 가르쳤다. 구한말의 국

가적 변란에 대해 도리道理의 보존과 전수를 자신의 처세 기준으로 삼고,

혼란의 시대를 만나 스스로 의리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따르는 것을 자

정自精으로 하여 처세의 기준으로 삼아 현실에 대응하였다.

1905년 봄에는 옥천沃川 산중에 있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1839~1912) 두 선생을 찾아가 가르

침을 받았다.

만년에는 집 뒷산에 집을 지어 만송재晩松齋라 이름하고 원근 학도들

을 가르치며 학칙學則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정색하여 질책하고 춘추

로 설강設講하여 사기士氣를 진작振作하였다.

늙어서도 지극한 효성이 시들지 않았다. 만송재에서 집까지 수리數里가

고한주(1871~1959)는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자는 방서邦瑞. 호는 외당

畏堂. 본관은 장흥長興. 아버지 제인濟寅과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의

아들로 광주 북구 장등동 출신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도에 있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의 종지宗旨를 알고 이치理致를 깨우쳐 실천에 임

하였다. 이때 간재 선생은 고한주가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히 배운 것을 행

하는 것을 보고 외당畏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는 간재의 의리 정신과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계승하여 향리

에 은거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나가며 후학을 가르쳤다. 구한말의 국

가적 변란에 대해 도리道理의 보존과 전수를 자신의 처세 기준으로 삼고,

혼란의 시대를 만나 스스로 의리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따르는 것을 자

정自精으로 하여 처세의 기준으로 삼아 현실에 대응하였다.

1905년 봄에는 옥천沃川 산중에 있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1839~1912) 두 선생을 찾아가 가르

침을 받았다.

  만년에는 집 뒷산에 집을 지어 만송재晩松齋라 이름하고 원근 학도들

을 가르치며 학칙學則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정색하여 질책하고 춘추

로 설강設講하여 사기士氣를 진작振作하였다.

  늙어서도 지극한 효성이 시들지 않았다. 만송재에서 집까지 수리數里가

되는데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부친을 문안하면 부친이 말하기를 “너도

나이 70이라 몸이 노쇠하니 이후로는 그러지 말아라.”하였다. 그러나 듣지

않고 스스로 말하기를 “입신立身하여 부모를 현양顯揚치 못할지언정 소

절小節인 이것을 못하면 어찌 자식의 도리이리요.”하고 조금도 소홀히 하

지 않았다.

  1959년에 죽으니 향년 89세였고, 뒷산 가장동可獐洞에 초장初葬하였다

가 동복同福 옹성甕城에 안장하였으며, 죽기 전에 스스로 만가輓歌를 짓

기도 했다.

『외당유고畏堂遺稿』는 9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석인본이다. 1책은

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권6의 내용은 「소쇄원기瀟灑園記」를

비롯하여 19편의 기記와 그밖에 발跋, 명銘, 사辭, 가사歌詞 등이 수록되

어 있다. 권7에는 「연재선생제문淵齋先生祭文」등 8편의 제문과 축문祝

文, 상량문上樑文, 비문碑文 등이 다수 실려 있다.

권 8에는 묘갈명墓碣銘,묘지墓誌, 행장行狀이 수십 편 실려 있고, 권 9는

부록附錄으로 가장家狀과 권순명權純命이 쓴 행장行狀, 송재성宋在晟이

 쓴 묘갈명墓碣銘과 25인이 쓴 만장挽章, 제문祭文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은 권순명權純命이 썼고, 발문은 없다.

  외당고선생경모비畏堂高先生景慕碑의 위치는 북구 장등동 205(장등

마을 입구)번지에 있다. 비의 규모는 길이 175cm, 폭 61cm, 두께 31cm이

며 비문은 1996년 이가원이 짓고 송성용이 썼다.




출전 외당유고,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광주권 문집해제,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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