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생진,음사>
독립운동 후원과 빈민구제에 힘쓴 독지가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



  이계익(1878~1946)은 구한말의 선비 독지가. 호는 송천松泉. 본관은 함

평. 오산梧山 용헌의 아들로 북구 오치동 하오치에서 태어났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일찍이 학문과 시문에 뛰어나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1903년 8월 1일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

고, 뒤에 승훈랑承訓郞 등의 관작이 제수되었다.

1911년 부친을 위해 오산정을 짓고, 동시대를 살았던 학자 운파雲坡 김

진현金珍鉉, 소방小舫 윤정식尹廷植, 소파小波 송명회宋明會, 최익현의

아들 운제雲齊 최영조崔永祚, 소봉小峰 이일李鎰 등이 이 정자에서 차오

산정운次梧山亭韻 등의 시를 남겼다. 따라서 이 정자에는 우리네 선인들

의 충언이 고스라니 묻혀져 있어 오치동은 유서 깊은 사연이 많은 곳이다.

1906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거의擧義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과 이완식李完植의 독립운동 등에 많은 협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 남달

리 자선심이 뛰어나 자신의 회갑 비용을 아껴 빈민구제에 힘쓴 진실한 독

지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함평이씨 기성군파보箕城君派譜나 그리고 그의 손

자로 이 정자를 수호하고 있는 이재열의 증언뿐 아니라 당시 각 명사 2백

명분의 육필원본肉筆原本을 모아 4권 1상자의 고급장정으로 표구한 그의

회갑시첩回甲詩帖에서도 이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를 비롯한 백관수白

寬洙, 최두선崔斗善, 오세창吳世昌, 정인보鄭寅普 등의 뛰어난 필적筆跡

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황홀케 하였다. 이러한 점을 보

더라도 송천 이계익의 당시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임을 느낄 수 있고 또

그의 효심에 의해 지어진 이 정자의 규모가 어떠함을 알 수 있다.

이 정자의 창건 내력을 살펴보면, 1911년에 오치의 안산案山에 세워져

별다른 이상 없이 그대로 보존해 오다가 1971년도의 남해고속도로 공사

로 인하여 부득이 오치동 518번지의 본가로 이건하였다가 1987년도에 다

시 그의 위치를 바꿔 현재의 장소로 이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를 관리하고 있는 주인 이재열씨의 말에 의하면 당초 이 정자를

이건할 당시 주변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필요 없는 옛날의 정각을 무엇하

러 많은 경비를 들여 옮겨 지으려 하느냐.”는 많은 핀잔을 받기도 하였다

는 것이다.

 그러나 자손의 도리로 선대의 유업을 지켜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두

차례의 어려운 이건을 거쳐 오늘의 보전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당 정

내亭內에 결려 있어야 할 주인 이계익의 12원운原韻, 정기亭記를 비롯한

윤용구尹用求, 김영한金寗漢, 최영조崔永祚, 고광조高光祚 등의 대서 현

판 및 찬미 시문詩文 등 30여개의 판각版刻이 창고에 방치되어 있어 정자

로서의 품위를 잃고 있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읍지, 북구 문화유적, 남도 정자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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