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무드리의 역사 |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 등으로 인하여 신흥무인집단으로 성장한 이성계는 위하도 회군을 계기로 사대부계층과 연합하여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지방제도를 답습하지만 태종 때에 개편작업에 들어가 성종 때에 『경국대전』의 완성과 더불어 중앙집권적인 제도가 완비된다.
광주목에는 나주목과 함께 도의 지시를 소령의 군현에 전달하면서 그들 통활한 계수관이 두어진다. 광주목에 속한 군현은 3도호부(장흥, 순천, 담양), 2군(보성, 낙안), 2현령(능성, 창평), 4현감(화순, 옥과, 동복, 진원)이었다. 태조 7년(1397년)에는 전라도 군을 전담하는 병마절도사영이 광산구 고내상(舊 송정읍)에서 태종 7년(1379년)에는 도강현(강진 병영)으로 옮겨졌다. 현재에도 송정리 고내상 옹보촌 일대에는 고내상성지가 남아 있다.
광주지역의 읍호는 여러 차례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면서 변경되었는데, 문종 원년(1451년)에는 광주목인 것이, 성종 20년(1489년)에 광산현으로 강등된 것을 비롯하여 연산국 7년(1501년)에는 광주목으로, 인조 2년(1624년)에는 광산현으로, 인조 12년(1634년)에는 다시 광주목으로, 숙종 27년(1701년)에는 광산현으로, 영조 33년(1757년)에는 광주목으로, 순조 9년(1809년)에는 광산현으로 고종 8년(1871년)에는 광주목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변경 속에서도 광주목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광산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지만 조선 전 기간에 걸쳐 광주라는 이름은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중심지인 읍성은 지금의 시내 중심가에 있었으며, 주위가 8,253자(척), 높이가 9자이고 그 안에 우물이 100개가 있었다. 이 읍성의 4대문은 현재 황금동 일대에 있던 서원문(서문), 충장파출소 부근의 공북문(북문), 전남여고 부근의 광이문(동문), 도청 옆 부근의 전남문(남문)이다.
우리 고을은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야 좀더 자세한 것들이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에 들면서 면, 리제가 정착되어 군현에 속한 면과 리명, 호구수 등이 『호구총수』(1789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광주목이 41면 375리를 관할 한 것으로 되어있고, 호수는 8,373호이다. 북구에 속한 것을 살펴보면, 상대곡면(청옥동 동부), 석보면(충효동), 황계면 (신용동), 마지면(본촌동), 천곡면(서산동), 기례방면(북동), 이십보면(문화동), 석제면(효죽동), 삼소지면(문화동, 장운동 일부), 우점면(우치동), 하대곡면(청옥동 북부), 경양면(효죽동, 풍향동) 등 12개 면이고, 호수는 2,461호이다.
우리 고을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유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존속된 원효사를 비롯하여 충효동 도요지, 구 광주농고(임동) 십신사지 비와 석불, 금곡동 김덕령장군묘, 그리고 가사문화의 산실인 충효동 일대의 환벽당, 풍암정, 취가정과 그 인근의 식영정, 소쇄원 등이 있다.
조선시대 8도의 지방제도는 갑오개혁으로 근대적인 행정제도로 개편되었다. 1895년 5월 1일에는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고, 광주는 나주부 아래의 광주군이 되었다.(1895년 5월 26일 반포, 칙령 제98호). 1896년 8월 4일에는 23부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이때 광주군은 전라남도 1등군으로 관찰부가 설치되어 전라남도의 중심지가 나주에서 광주로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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