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무드리의 역사 | 고려시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한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것은 918년이다. 그러나 북구 등 광주지역의 후백제 잔여세력은 그 후 20여 년 동안 고려에 완전 복속되지 않고 저항하였던 것 같다. 고려가 지방 세력을 흡수.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질서가 확립된 이후이다.
고려시대 지방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2년(983년)에 12목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이때 고려에 협력한 나주와 승주에 목이 설치되어 절도사가 파견되나 광주지역에는 강등되어 자사가 파견되었다. 이는 광주지역이 후백제와 연결되어 왕건에 저항하였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종 8년(1005년)에는 광주를 자사에서 또 강등하여 해양현령을 파견한다. 고려 10도중 하나인 해양도는 전남지방인데, 해양현은 광주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현종 때에는 지방제도 개편작업을 하여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으로 정비하는데, 전남지방은 나주목을 비롯하여 1지사부(장흥), 4지사군(영광, 영암, 보성, 승평), 4현령관(해양, 진도, 능성, 탐라)으로 편제된다. 이때 전주와 나주를 합쳐 전라도라 칭하게 되었다.
무등산에서는 신라 때 소사에 이어 고려 때에는 국제가 행하여졌다.
이는 무등산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씨무신정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민심이 불안해져서 각지에서 난이 일어났다. 그중 백제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이연년 형제를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은 담양 원율에서 난을 일으켜 해양, 암양을 석권하고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나주를 공략하였다.
이 시기 우리 고을도 이에 합세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무등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후 몽고군이나 왜구들이 지휘본부를 무등산에 설치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고종 46년(1259년)에 광주는 해양현에서 지익주사로 승격되고, 뒤에 목으로 승격되지만, 충선왕 11년(1301년) 광주목에서 강등되어 화평부가 되었다. 13세기 중엽(1254~1387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아 그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 왜구는 나주출신 정지장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우리 고을과 관련된 고려시대 유물과 유적은 원효사에서 금동 또는 청동불, 쌍용문거울, 기와 등이 출토되었고, 개원통보, 원우통보 등이 출토된 청풍동 석곽묘, 장운동 5층석탑(현 국립광주박물관 야외 전시장)과 석불좌상, 망월동에 있는 정지장군 예장석묘(지방기념물 제2호)와 정지장군 환삼(보물 336호, 현 광주시립민숙박물관 전시) 등이 있다. 청풍동에 있는 무진고성도 고려시대 초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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