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무드리의 역사 | 통일신라시대

우리의 북구 지역을 포함한 광주는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의 실패로 인하여 신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당의 소정방은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가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1부 7주로 개편하였다. 문무왕 18년인 678년에 아찬 천훈이 무진주 도독으로 파견되었다. 도독이 파견된 것은 이 지역의 지방 세력을 흡수 또는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서, 이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5도호부가 웅진도독부로 되면서 7주 52현을 두었는데, 이때 전남지방으로 비정된 사반주(혜호이성, 장성 또는 영광), 대방주(죽군성, 나주회진), 분차주(파지성) 등 3주가 있다.
이중 분차주를 승주 낙안지역으로 보고 있지만 그 속현들이 모두 장성진원, 담양창평 등 광주의 인근지역임을 들어 낙안보다는 오히려 그전부터 중요지역으로 여겨오던 무진주인 광주지역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의 문무왕조 기록 중 무진주 안길의 기사는 무진주의 토호(지방 세력가)인 중앙세력과 연결되어 그에 협조하는 세력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7세기 후반 경 광주지방에는 세력가들이 건재하고 있었고, 중앙세력이 이들을 흡수하려고 한 것으로 해석된다. 신문왕 5년에 9주가 처음 갖추어지고, 6년에 주, 군을 정비하면서 무진주군에 주가 설치된다. 경덕왕 16년(757년)에 9주 5소경으로 지방제도가 완비되고 117군 239현으로 정비된다. 이때 무진주는 무주로 개편되고 15군 43현이 이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무진주와 무주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경덕왕 5년(813년)에 무진주 도독으로 있었던 이찬 김헌창이 822년에 웅천주 도독으로 있을 때 난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였는데, 이 난에 무진주도 협조한 사실이 있다. 이는 중앙세력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지방 세력의 반항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반항은 그 후 청해진의 장보고나 892년 견훤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모반하였을 때 무진인 염장에게 살해되고, 또 장보고의 부장인 이창진 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무주의 별장인 염문에게 평정된 것은 무진주와 중앙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광주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중심지는 현의 북 5리에 있던 토성인 무진도독고성으로 보인다. 이 성은 아직 정확하게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북구 청풍동과 동구 산수동의 경계인 잣고개 부근에 있는 무진고성을 무진도독고성이나 그와 관련된 배후산성으로 보고 있다. 또 무등산 원효사에서도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출토된 바 있으며, 두암동 불당골에도 통일신라시대에 속하는 가마가 있었다. 무진악(무등산)에서 소사를 올린 기록 등으로 보아 무등산이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통일신라시대에 우리 고을의 중심지는 무진도독고성이었고, 견훤의 기병과 왕건의 나주 진출로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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