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충신,의병> 경렬공景烈公 정지鄭地
고려말 왕에게 ‘왜구 토벌책’을 올리고 고려 4대첩의 하나인 관음포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정지(1347~1391)는 고려 말의 무신. 초명은 준제准提. 호는 퇴암退庵.

시호는 경렬景烈. 본관은 하동. 이履의 아들로 전라도 나주목 거평면,

현 나주시 문평면 안곡리 죽곡 마을에서 태어나 1391년에 윤이

尹彛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

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 뒤 광주에 물러나 있던 중 판 개성 부

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1365년(공민왕 14) 무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진출하여 1374년(공민왕

23)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국왕을 가까이 모시고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을 올린 사람이 없다는 탄식을 듣고 왕에게 왜구토벌

책을 올렸다. 이것을 계기로 전라도 안무사에 발탁되어 왜인추포만호倭人

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 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

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 특히 수군

양성을 강조한 그는 수군의 강화와 함께 전선戰船도 건조하였다.

1377년(우왕 3) 여름, 예의판서,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 낙안의 왜구

18명을 사살하고 3명 생포했다. 그해 겨울에 왜구 40여 명을 사살하고 2

명을 사로잡았다.

  1378년(우왕 4) 왜구가 영광군, 광주광역시, 동복同福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 등지를 침략해 오자, 그가 도순문사 지용기 및 조전원수 이

림, 한방언 등과 함께 옥과현玉果縣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까지 추격했

는데, 적이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가자 아군이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마구

공격하니 적은 대부분 불에 타 죽었으며 말 100여 필을 노획했다. 이 전투

에서 정지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에, 승첩을 보고하자 정지 및 지용기에게

각각 은 50냥을 하사하였다. 왜구가 다시 담양현潭陽縣 지금의 담양군을

침략했으나 정지와 지용기가 격파해 17명의 목을 베었다. 곧이어 정지는

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다.

1382년(우왕 8) 해도원수가 되었는데, 왜선 50척이 진포鎭浦 지금의 충

청남도 서천군으로 들어오자 그가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내었고, 군산도

群山島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까지 추격하여 배 4척을 포획하였다.

  1383년(우왕 9) 그가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에 주둔하던 중

에 왜구가 큰 배 120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를 침략해 왔는데, 이때 출전하

여 선봉에 있던 20척과 전투를 벌였고, 격파하여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이것이 바로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더불어 유명한 전투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는 관음포 전투이다. 이후 정지

는 이때의 전공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도 도원수 겸 양광전라경

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로 임명된다.

  1384년(우왕 10)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

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와 이키시마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

도 하였다.

  1387년(우왕 13) 스스로 대마도 정벌을 자청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주

장은 이러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

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

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

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

와 이끼도壹岐島 지금의 나가사키현長岐縣 이끼도壹岐島에 웅거해 가까

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수시로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

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

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

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1281년(충렬왕 7년) 일본 정벌 당시 몽골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

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

되면 피로해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

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절대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정지 열전>

  1388년(우왕 14) 안주도 도원수로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 휘하에 소

속되어 제2차 요동 정벌에 참여했는데, 그즈음 이성계가 출전하기 전에

사 불가론을 주장하며 예측했던 대로 왜구가 3도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

생하였다. 상황이 그리되자 위의 전공들로 인해 왜구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가 위화도 회군 직후 영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로 임명되

어 도순 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과 진원서, 전주 목

사 김용균, 양광도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

는데, 이때 적을 대파하여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하는 승

리를 거둔다. 당시 사람들이 “이번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3도의 백성은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라며 안도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듯 동시대의

선배 명장인 최영, 이성계 못지않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듬해 우

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 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

州 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2등 공

신에 봉해졌다.

  1391년(공양왕 3)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 옥에 갇

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나주로 낙향하지 않고 광주목 편방면 현 동구

동명동으로 낙향하였다. 그가 광주에 살다가 생애를 마치고, 묘소 또한

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에 소재해 있어 광주 인물로 분류하였다.

1644년(인조 22)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현 동명동에 경열사를 세워 모

셨으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 훼철되고, 일제강점기인 1921

년 나주 노안 금안동에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셨으나, 1981년 북구

망월동에 경열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광주광역시는 서구

농성동 서구보건소 앞 사거리에서 북구 중흥동 광주역 앞 교차로를 잇는

도로를 경열로라 하였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광주시사, 정지장군, 고려사 정지열전, 경열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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