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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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강동
    ● 동명의 유래 용강동(龍江洞)은『호구총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의 자료에는 우치면 관할로 龍江里가 있다. 龍江은 굽이쳐 흐르는 강가에 마을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龍江’이라 불렀다 한다.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龍’은 상상의 동물인데 예로부터 중국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그것은 옛날은 농사를 지음에 있어서 수리 시설이 잘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치수를 잘하여 농사가 풍년이 들면 임금이 덕이 있고 가뭄이 들거나 치수가 되지 않아 농사가 잘못되어 흉년이 들면 임금이 덕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물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임금이 해야할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우리 옛말에 ‘용(龍)’은 ‘미르’라 하였다. 그런데 이 ‘미르’는 물[水]을 뜻하는 옛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물’에서 원순모음화 하여 ‘믈>물’이 되었을 것이므로 ‘믈’을 의미하는 ‘미르’는 ‘mVrV-’로 옛말이 개음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믈>물’의 ‘mVr'은 현대어에서는 폐음절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옛날에 ‘물(水)’을 뜻하는 ‘미르’가 ‘믈’로 발음되다가 ‘ㅡ’가 ‘ㅜ’로 원순모음화되어 불리는 단어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龍’자가 들어가 쓰이고 있는 지명은 물줄기가 대체로 굽이굽이 돌아흐르는 특성으로 인하여 이를 뱀이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에 이를 ‘龍’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물’을 뜻하는 옛말이 ‘ㅁ’과 ‘ㄹ’이라는 자음을 가지는 말이므로 이것이 ‘용’을 뜻하는 ‘미르’로 파생되어 쓰이게 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게 한다. 분명 龍은 물과 관련된 어사라 추정할 수 있다. 龍을 뜻하는 옛말 ‘미르’가 ‘물(水)’과 관련이 깊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기(新其)마을▶ 마을의 유래이 마을의 생성 유래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 곳에 새로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해서 신기 또는 새터라 불려졌다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전씨, 추씨, 강씨로 약 200년 전에 이 곳으로 이주해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입암, 신평, 용강, 동작, 서작, 종방, 학림리 각 일부가 우치면 용강리로 통합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용강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잉어등 : 논 모양새가 잉어처럼 생겨서 잉어등이라 불려졌다 한다.- 낚시터 : 옛날 이곳이 바다였을 때 배를 타면서 낚시를 했다하여 낚시터라 불려졌다 한다.- 구덕이 : 낚시터에서 잡았던 고기를 잡아넣어 두었던 곳이라 하여 구덕이라 불려졌다 한다. 기타 보산골 등의 지명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학림(鶴林)마을▶ 마을의 유래마을의 모양이 숲 속에 학이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학림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은진 송씨로 167년 전에 쇠북증이 마을에서 이 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입암, 신평, 용강, 동작, 서작, 종방, 학림리 각 일부가 우치면 용강리로 통합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용강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지명- 요강 배미 : 논 모양이 마치 요강처럼 생겼다하여 요강 배미라 불려졌다고 한다.- 진 배미 : 논 모양이 길어서 진 배미라 불려졌다고 한다.- 장구 배미 : 논 모양이 마치 장구처럼 생겼다하여 장구 배미라고 불려졌다 하낟.- 섬 배미 : 논 모양이 마치 성처럼 생겼다 하여 섬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용강(龍江)마을▶ 마을의 유래강에 용이 살았다고 하여 용강 마을이라 불려졌다 하며 근처 용강동 일대 중에서 처음 용강이란 말을 사용하여 원용강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나씨였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그 후로 약 250년 전에 광산 김씨와 백씨가 내지, 봉산에서 이주해 와서 살았다 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입암, 신평, 용강, 동작, 서작, 종방, 학림리 각 일부가 우치면 용강리로 통합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용강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됨- 1998년 9월 21이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장구시암 : 샘이 장구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장구시암이라 불려졌다 한다.- 수논 : 논에 수렁이 있어서 수논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보신 배미 : 논 모양이 마치 보신처럼 하고 있어서 보신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진태골 : 논에 오리를 만들어 대나무에 매달아 놓았다고 해서 진태골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동산 배미 : 논에 동산이 있다고 하여 동산 배미라 불려졌다고 한다. 기타 죽 배미, 갈무골, 고네, 중반, 가지미, 철나배미 등의 지명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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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두동
    ● 동명의 유래 용두동(龍頭洞)은 본래 광주군 갑마보면의 지역으로서, 뒷산이 용머리 형국으로 되었다하여 龍頭라 하였다.하지만 이는 견강부회이다. 본래 이곳은 담양과 창평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합수되어 흘러내리는 곳으로 물줄기가 매우 구불구불한 곳이므로 물줄기가 마치 용이 굼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곳에 ‘龍’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이 생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의 중심 마을인 伏龍마을도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이기 때문에 불리는 지명이다. 때문에 ‘龍頭’ 마을은 伏龍 마을보다 물줄기의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伏龍’ 마을에서 ‘龍’자를 취하고 물줄기의 상류라는 의미에서 ‘頭’자를 취하여 지어진 마을명이라 생각한다.* 용두(龍頭)마을▶ 마을의 유래용두마을의 마을의 뒷산이 용의 머리 형국으로 되었다고 하여 용두마을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마을 뒷산과 거진마을 중간지점과 마을 앞 논과 밭에서도 선사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토기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 곳은 지리적으로 강을 가까이 하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구체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약 350여년 전으로 번남 박씨 朴世格씨가 나주에서 이주하여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이 후 자손이 번창하여 해방 전까지는 70가구가 넘는 번남 박씨들의 자작일촌 이었으나 광산 김씨, 청주 한씨, 진주 정씨 등 타 성씨의 유입으로 산성촌이 되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 - ▶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호구총서(1789) 기록에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용두촌, 지상촌, 지하동이 나타나 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거상리, 거하리, 신기리의 각 일부가 삼소지면의 하대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용두리라 해서 본촌동에 편입하였음-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용두동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용두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1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관할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 삼소, 우치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거북고개 : 용두마을 남쪽, 거상으로 넘어가는 고개- 도치 배미 : 도끼와 바꾼 논- 구래실 : 바닥이 깊고 비옥한 논- 산두 배미 : 나락을 논에 심지 않고 밭에 심었다고 한다.- 정짓등 : 정자나무가 있었던 곳- 신들메 : 신들린 산- 자래봉 : 자라모양의 산봉우리- 배나무 잔등 : 500여년 전에는 이 지대가 바다였는데 배가 넘나들었다는 곳- 곱은골 : 지야동과 경계가 되는 논- 갱변 : 냇가에 있는 들- 뭇도랑가상 : 뭇몰을 넘쳐흐르는 도량 옆- 소반 배미 : 소반같이 생긴 논- 장재고개 : 본촌동과 용두동의 경계에 있는 논- 뛰엄바위 : 아이들이 뜀뛰기를 하며 놀았던 바위기타 헌솥골 등이 있다.* 거상(巨上)마을▶ 마을의 유래약 200년 전에 홍주 송씨의 선조가 충청도 홍주에서 난리통에 당쟁을 겪어 쫓겨다녔다고 한다. 이중 고을 원님으로 계시던 두 분이 신양지에 터를 잡아 살다가 그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거상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서 4명이나 과거에 급제를 함으로써 양반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다. 원래 이 마을은 큰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거진이라 했으나 지금은 거상으로 바뀌고 바로 옆 마을을 거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름이 바뀌게 된 연유는 알 수가 없다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거하리가 본촌면 관할 용두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산군 지산면 16개리가 광주시로 편입될 때 광주시 용두동이 관할이 됨- 1957년 12월 1일 지산출장소 관할 우치동이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을 설치하여 현재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탁주 배미 : 논이 싸서 탁주와 바꾸었다고 하여 탁주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된장사리 : 된장과 논을 바꾸었다고 하여 된장사리라 불려졌다고 한다.- 새터 : 마을 아래에 위치한 집들로 뒤늦게 집들이 형성되어 있는 곳을 새터라 불렀다 한다. 기타 거상방죽, 때쭈골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거진(巨辰)마을▶ 마을의 유래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서씨와 마씨로 구전되고 있을 뿐 그 시기와 연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 뒤 입향한 성씨는 광산 김씨로 200년 전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지금은 광산 김씨, 능주 구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감마보면 거하리가 본촌면 관할 용두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용두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괴내 : 방죽 밑의 지역을 괴내라 불렀다 한다.- 포전밭 : 푸석푸석 할 정도로 건조한 밭을 포전밭이라 불렀다 한다.- 큰고개 : 새터마을의 옆길로 복룡마을로 가는 산길을 큰고개라 불렀다 한다.- 거진방죽 : 거진에 있는 방죽을 거진방죽이라 불렀다 한다. 기타 거진제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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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봉동
    ● 동명의 유래 용봉동(龍鳳洞)은 본래 광주군 오치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반룡리롸 용주리, 봉곡리, 청계리, 하촌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반룡(盤龍)과 봉곡(鳳谷)의 이름을 따서 용봉리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지명에서 반룡(盤龍)이라는 지명을 쓸때는 대개 그 지역이 풍수지리적으로 용이 몸을 둥글게 똬리(또아리)를 틀 듯 서리고 있는 형국이라하여 마치 용이 소반에 담겨져 있는 용이라는 뜻으로 작명하여 부르는 곳이 많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분포한 반룡(盤龍)이란 지명이 불리고 있는 지명들을 살펴보면 대구시 동구 신기동의 반룡소(盤龍沼)는 고유어 지명으로 ‘바랑쏘’라 하였고, 경남 마산시 般龍山(盤龍山)은 일명 ‘팔룡산’이라 하여 ‘발’이라는 소리와 관련되어 있지만, 경남 김해의 반룡산(盤龍山)은 일명 ‘시리봉’이라 하고 경남 고성군 하일면 오방리의 반룡티(盤龍峙)는 일명 ‘서르태’라 한다. ‘서르태’의 ‘태’는 ‘고개’를 뜻하는 ‘티>치’를 말하는 것으로 파악되므로 곧 ‘설’이라는 소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라 생각된다.그런데 이곳 용봉동에는 봉곡(鳳谷)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는데 고유지명으로는 ‘저불’이라 부르지만『호구총수』지명 자료에는 ‘赤佛’로 표기되고 있다. ‘鳳’도 훈이 ‘새’이고 충청도에서 ‘赤鳥峙’를 고유어로 ‘새오재’라 부른다 하므로 ‘赤’은 ‘밝’과 관련시켜 말한다면 아침이면 날이 밝아지므로 ‘赤’을 ‘새’로 읽을 수 있다.鳳谷과 赤佛은 다 같은 의미의 어사로 추정할 수 있고 앞의 경남 김해 ‘시리봉’의 ‘실’과 고성군 하일면 오방리의 반룡티(盤龍峙)의 ‘서르태’의 ‘설’과 관련이나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서린다’의 ‘설’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이 지명은 ‘실’과 관련이 깊은 지명이라 판단되니다. ‘실’은 ‘谷’을 뜻하는 지명어이다. 골짜기는 물줄기가 흘러내리면서 대지를 가른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우리 선인들이 水邊지역에 정착하여 살아가면서 그들이 사는 지리적 특징을 반영하여 지명을 명명했던 관습이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한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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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산동
    ● 동명의 유래 牛山洞은 본래 광주군 瑞陽面의 지역인데, 1914년 官前里, 峙洞里와 大街里, 孝竹里, 屛門里, 溪川里, 新興里의 각 일부와 두방면의 두암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뒷산이 와우 형국으로 되었다하여 우산리라 하여 瑞坊面에 편입되면서 생긴 이름이다.그러므로 ‘牛山’이란 이름은 이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효죽동우체국이 있는 산이 와우형국이라 하여 ‘牛山’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명당 이름은 대개 옛 지명에 따라 지어지는 것이 통례라 생각한다. 따라서 이곳의 지명으로 ‘牛’자가 쓰인 지명은 없었고 단지 ‘孝竹洞’이라는 지명은 있었다. ‘孝竹洞’은 서방에서 담양 가는 도로의 좌우지역의 옛 동명이다. 때문에 지금도 이곳에는 ‘효죽동우체국’, ‘효죽동파출소’가 있다. ‘효죽동(孝竹洞)’은 본래 ‘소도(蘇塗)’와 관련된 지명이다. ‘소도(蘇塗)’는 삼한때 큰 나무에 방울을 달아 세우고 신에게 제사 지냈던 곳으로 이곳에 죄인이 들어가도 잡지 못했던 신성한 곳이었다. 이런 풍습은 ‘솟대’나 점쟁이 집에 대나무를 세우는 풍습으로 발전했다. ‘솟대’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마을 어귀에 높게 대나무를 세운 풍습’인데 효도했다는 의미로 이는 부모에 효도를 다했다는 의미에서 ‘효대’라 하고 ‘孝竹’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효자’를 ‘소자’라 발음하는 구개음화 현상이 있다. 때문에 ‘효’를 ‘소’로 발음함에 따라 ‘솟대’가 ‘효대’가 되고 ‘효대’는 ‘孝’(효도 효)자와 ‘대’는 ‘竹’(대 죽)자를 택하여 ‘효죽(孝竹)’이라 표기하여 생겼다. 이런 지명은 구례군 문척면 월전리의 ‘효죽동’과 충북 중원군 노은면 신효리의 ‘孝竹(솟대울)’,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소학리의 ‘孝竹(솟대배기)’등이 있다.이렇게 이곳에 ‘孝竹’이라는 ‘솟대’가 세워졌고 이를 ‘효죽’이라 부르게 되자 이곳의 산을 ‘솟대’의 ‘소’와 관련시켜 臥牛形(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이 산을 ‘牛山’이라 생각하고 ‘牛山洞’이라 동명을 지은 것이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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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전동
    ● 동명의 유래 용전동(龍田洞)은 본래 광주군 우치면의 지역으로 일명 ‘낙촌(落村)’ 또는 ‘용전(龍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시변리, 동작리, 서작리, 생룡리, 지내리, 신평리의 각 일부와 갑마보면의 지산리, 대야리, 삼소지면 해산리, 대치면 응기리의 각 일부와 갈전면의 신룡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용전리라 하다가,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된 곳이다.* 용산(龍山)마을▶ 마을의 유래일제시대에 큰 우시장이 섰던 곳으로 영산강변에 위치해 지형이 낮아 물이 많고 습한 곳으로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진주 정씨인 정우현씨로 1920년대에 전남 보성에서 피난을 왔다가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지산의 아홉마리 용 중, 용의 머리부분에 위치해서 용산이라고 했다 한다. 과거에는 마을 옆 영산강변에 제방이 없어 자주 홍수피해를 입는 저지대 지형이어서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 집들을 높게 지었다 한다.▶ 마을의 연혁-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용전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우치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이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 우치, 삼소동이 통합하여 건국동 설치▶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쇠전머리 : 우시장이 섰던 곳으로 나룻배가 있었으며 그래서 쇠전머리라 불려졌다 한다.- 용산리 장터 : 예전에 담양, 장성등 인근 지역을 상대로 한 큰시장이 섰던 곳을 용산리 장터라고 불렀다 한다.- 집동네 : 제방 벽을 잔디로 깔았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똥매동 : 용산마을 옆에 있는 등성이를 똥매동이라 불렀다 한다.기타 아랫버틀, 삼버틀, 용산토월 등* 용전(龍田)마을▶ 마을의 유래 용전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마을의 지형이 마치 배가 흔들리는 형국이라고 하여 誨遊라고 부리우다가 어느 해 홍수가 난 이후에 물이 흔한 마을이란 뜻으로 落村이라고 하였으나 落村의 落이 떨어지다라는 부정의 의미가 담겨 있어서 이 후 영산강상류지역 인근에 아홉용(생룡, 용산, 신용, 용두, 오룡, 복룡, 용강, 용전, 거룡)과 관련하여 용이 노니는 들판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서 용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이 마을의 형성된 시기는 약 500년 전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 정씨가 전쟁을 피하여 피난을 오다가 이 곳에 정착하여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진주 정씨와 광산 김씨가 함께 터를 잡았다는 설도 있어서 마을의 유래는 명확히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광산 김씨 김영환씨의 6대조 할아버지인 김상홍씨가 과거에 급제하여 솟대를 세웠다고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고 짐작 할 수 있겠다. 최근에 김용완씨 농장에서 수백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와편과 도자기 그릇이 발견되어 마을 생성시기가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이 후에 오씨 등이 유입되어 현재는 진주 정씨, 광산 김씨, 오씨등과 여러 성씨 등이 어우러져 3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특히 이 곳은 일제시대 때 소작회라고 하는 마을 조직이 있어서 이 지방 조작쟁의 운동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우치면의 시변, 용전, 동작, 서작, 생룡, 지내, 신평리, 갑마보면의 지산, 대야리, 삼소지면의 지해산리, 대치면의 응가리, 갈전면의 신룡리등 지역이 우치면 관할의 용전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용전리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우치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되어 현재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금보 : 소재들 서쪽에 있는 샘(혈보라고도 한다.)- 다방골 : 용전 동쪽에 있는 마을- 당산거리 : 당산나무 근처에 있는 마을- 동작 : 용전 동편에 있는 마을- 서작 : 용전 서편에 있는 마을- 소재들 : 용전 서쪽에 있는 들- 작지 머리들 : 소재들 남쪽에 있는 들. 수문이 있었던 곳이다.- 장구달들 : 용전 동쪽에 있는 들- 장성 배기 : 장승이 박혀 있던 들이다.- 지래기 : 장구달 위쪽에 있는 긴 들- 안애미 : 마을 안쪽에 있는 마을- 선밧들 : 예전에 배가 드나들었다는 곳- 싸래들 : 마을 북쪽에 있는 들- 지산 장터 : 지산장이 있었다는 장터- 채양거리 : 물이 흔한 곳이며 싸래 북쪽에 있는 들- 개떡 배미 :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개떡 하나와 논을 바꿨다 해서 붙혀진 이름- 세상동 : 과거 고려장이 주로 이루어진 곳으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세상동으로 간다고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묘가 많이 있는 곳이다.)- 지레기논 : 논의 길이가 길다하여 불려진 이름- 대파리봉 : 용전 뒷산에 위치한 산봉우리- 장구달 배미 : 장구 모양의 논- 여시매 : 여시처럼 생긴 산-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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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암동
    ● 동명의 유래 운암동(雲岩洞)은 본래 광주군 황계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대내리와 용산리, 대자리의 각 일부와 군분면의 신방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雲巖山 밑이 되므로 운암리라 했다. 『호구총수』에 의하면 黃界面의 옛 지역은 “竹林村, 大內洞, 射亭, 新村, 大自里, 蛇山村” 지역이었다. 이곳에 ‘大自里’가 있는데 지명으로 볼 때 이 지명은 옛날에 城이 있었기에 불려졌던 이름으로 추정되며 ‘射亭’ 또한 城주변에서 전쟁을 위해서는 활쏘기 연습은 가장 필요한 활동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竹林’이란 마을이 있는 것은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과 잘 어울리는 조건이다.중국 사서에 “溝者 句麗名城也”<魏志 東夷 高句麗>라 하여 고구려에서는 城을 ‘溝’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溝溇’는 이를 한 음절로 읽으면 ‘굴’이 되는데 이는 음이 ‘구룸’과 상사하다. 그러므로 ‘雲岩’은 이곳 주변에 ‘城’이 있기에 ‘溝’와 음과 상사한 훈을 가진 ‘雲’자를 빌어 표기한 지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을의 유래운암동은 운암산(雲岩山)의 이름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조선 후기 이 지방은 광주군 황계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내리(大內里), 용산리(熔山里), 대자리(大自里)의 일부와 함께 최초로 운암리라는 명칭으로 극락면에 편입되었고, 1957년 동(洞)제 실시에 따라 동림동과 함께 동운동으로 개편되었다.1982년 9월 1일 동운1동과 동운2동으로 분동 되었다가, 1993년 동운1동이 동운1동과 동운3동으로 분동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3월 1일 동운3동이 운암3동과 동림동으로 분할되고, 동운1,2동은 운암1,2동으로 명칭 변경되면서 운암동이라는 원래의 명칠을 찾게 되었다. 북구에서 가장 남쪼에 있는 운암동은 운암산(131m) 자락에 안겨 있는 알터이다. 주위의 지세가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라 풍수지리상 황계구란형 명단(黃鷄拘卵形 明堂)이라고 한다. '대자실'을 황계(黃鷄)로 풀어 황계면(黃界面)이란 행정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대내(안짝)마을 뒷동산에 '명당등'이란 땅이름이 남아있어 이를 뒷받침 해준다.『호구총수』에 의하면 黃界面의 옛 지역은 "竹林村, 大內洞, 射亭, 新村, 大自里, 蛇山村" 지역이었다. 이곳에 '大自里'가 있는데 지명으로 볼 때 이 지명은 옛날에 城이 있었기에 불려졌던 이름으로 추정되며 '射亭' 또한 城 주변에서 전쟁을 위해서는 활쏘기 연습은 가장 필요한 활동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竹林'이란 마을이 있는 것은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과 잘 어울리는 조건이다.중국 사서에 "溝漊者 句驪名地" <魏志 東夷 高句麗>라 하여 고구려에서는 城을 '溝漊'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溝漊'는 이를 한 음절로 읽으면 '굴'이 되는데 이는 음이 '구룸'과 상사하다. 그러므로 '雲岩'은 이곳 주변에 '城'이 있기에 '溝漊'와 음과 상사한 훈을 가진 '雲'자를 빌어 표기한 지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을의 연혁- 1757년(조선시대) 광주목 황계면- 1896년 광주군 황계면 용산리- 1914년 광주군 극락면 운암리- 1955년 7월 1일 광주시 유촌출장소 설치- 1957년 광주시 동운동- 1961년 3월 1일 광주시 서부출장소- 1973년 7월 1일 서구청 설치- 1980년 4월 1일 북구청 설치- 1982년 9월 1일 동운1, 2동 분동- 1986년 11월 1일 광주광역시 승격- 1993년 12월 1일 동원1, 3동 분동- 1995년 1월 1일 광주광역시 승격- 1997년 3월 1일 동운3동이 운암3동과 동림동으로 구분 개칭되고 동운1,2동은 운암1,2동으로 명칭 변경되면서 운암동이라는 원래의 명칭(법정동명)으로 개칭▶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구사산 : 사산 동쪽에 있는 옛 사산 마을 - 대내(안목) : 안짝과 밭짝 사이에 있는 마을- 대자실(대자리, 황계) : 암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뒷산에 황계포란형의 명당이 있다하여 황계라고도 하였음.- 밭짝 : 대자실 서쪽에 있는 마을- 사산(용산) : 지아막 북쪽에 있는 마을. 뒷산이 뱀 또는 용처럼 생겼다함- 신사산 : 사산의 새로된 마을-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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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정동
    ● 동명의 유래 운정동(雲亭洞)은 본래 광주군 하대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어운리, 복정리 일부와 창평군 선면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魚雲과 福亭의 이름을 따서 운정리라 하였다. 따라서 雲亭洞은 魚雲과 福亭에서 한 글자씩을 취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魚雲’은 ‘魚’자로 표기되고 있지만 지명에서는 ‘於’자를 쓰는 곳이 많음으로 보면 ‘於’가 ‘魚’로 바뀌어 표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於雲’이 될 것인데 이는 ‘늘운’이라 읽었을 것이다. 따라서 ‘늘운’은 ‘느룬>느른’으로 불리는 지명이었을 것이니 ‘날’계 지명이라 생각할 수 있다.그러면 ‘福亭’은 어떻게 명명된 지명일까? 대개 ‘福’자가 들어간 지명은 냇물을 막아 논에 용수하는 보를 뜻하는 지명이 많다. 예를 들면 전남 보성의 경우에도 삼국사기에는 “寶城郡 本百濟 伏忽郡”이라 하였는데 ‘忽’은 ‘城’을 뜻하는 말이니 ‘城’으로 바뀌었고 ‘伏’은 ‘寶’로 바뀌었는데 이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洑’를 표기하는 지명어가 아닐까 한다. 즉 ‘伏’이 ‘寶’로 바뀐 것이다. 또 경북 영덕군 지품면의 ‘洑谷理’는 일명 ‘보골, 보곡, 복곡’이라 하는데 이는 ‘洑(보 보(나루 복))’를 소재로 하여 명명된 지명이다. 또한 전남 광양군 진월면 선소리의 ‘伏谷貯水池’도 ‘洑’를 ‘伏(엎드릴 복)’자로 잘못 표기하고 있지만 이는 ‘보(洑)’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위의 ‘福亭’은 고유어 지명으로 ‘복다우’라 하는데 ‘다우’가 무슨 뜻인지는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이는 보를 막음에 따라 생기는 다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福亭 마을 인근에 보를 막은 곳이 있어 甫村과 外甫村이라는 마을명이 산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 福亭 마을을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복바우’라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에 사는 양광식(70세)에 의하면 ‘복바우’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예로부터 죽 ‘복다우’라 불러왔다고 증언한다.‘복바우’가 있다면 ‘福岩’으로 불러야 한다. 福亭이라 부르는 것은 ‘복바우’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석연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마을에는 특별히 ‘복바우’라 지칭하는 바위는 없다. 보통 ‘복바위’가 있다면 ‘福’자 보다는 땅에 박힌 돌이니 ‘엎어진 돌’이라 하여 ‘伏岩’이라는 이름을 쓰는 마을이 많다. 이 마을에 사는 양광식(70세)씨에 의하면 이곳 福亭 마을과 용호 마을 사이의 냇물에는 보(洑)가 있다 한다. 이 보는 예로부터 복정 마을에서 관리해 왔다한다. 그리고 이 보는 일제 때 막았는데 보를 막기 이전에는 시멘트가 아닌 흙이나 돌로 막아서 논에 用水했기에 마을의 이름을 福亭이라 부르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주룡(舟龍)마을▶ 마을의 유래이 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주룡(舟龍)마을의 뒷산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명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명당은 황룡이 배를 등에 지고 있는 형국인 黃龍負舟形舟龍마을이라고 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200년 전에 함양 박씨가 들어왔으며 이후에는 천안 전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장등동, 맹동, 어운동 마을이 광주군 하대곡면에 속함.-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대곡면 어운, 복정리 각 일부는 운정리가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 석곡면 장등, 운정리가 됨.- 1957년 7월 1일 광주시 망월출장소 관할 장등, 운정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석곡 출장소 장운동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동구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관할의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장운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충효동, 청옥동, 장운동은 신설된 석곡동이 됨.▶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텃베미, 큰뫼, 옥수봉, 동갈막봉, 배진바우 등이 있다.* 어운(魚雲)마을▶ 마을의 유래어운마을은 예전에는 맹골이라 했다한다. 그 이유는 예전에 이곳이 바다였을 때 배를 맨 골이라고 하여 배맹골이라 했다. 그래서 그후 맹골로 불려졌다한다. 하지만 어운이라 불리게 된 연유는 잘 알 수가 없다. 이 곳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의성 김씨로 문계 상복이라는 분이 경상도 의성에서 조선 정조 때 이곳으로 건너왔다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장등동, 맹동, 어운동 마을이 광주군 하대곡면에 속함.-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대곡면 어운, 복정리 각 일부는 운정리가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 석곡면 장등, 운정리가 됨.- 1957년 7월 1일 광주시 망월출장소 관할 장등, 운정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석곡 출장소 장운동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동구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관할의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장운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충효동, 청옥동, 장운동은 신설된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웃골 : 어운마을 앞에 있는 지명- 민거리 : 앞산 등성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인데 이곳에 소를 메어서 민거리라 했다.- 쇠똥구리 : 소가 똥을 싼 형국이라 쇠똥구리라 했다. 기타 개금골, 진베미, 학우베미 등이 있다.  * 용호(龍虎)▶ 마을의 유래용호마을은 예전에는 염봉쟁이라 하여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1910년까지 장터가 형성 되었다고 한다. 용호마을이라 불려지게 된 연유는 풍수지리상 마을 좌측에 있는 산이 용모양을 하고 있고 우측에 있는 산이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서 용호라 불려지게 되었다한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전주 이씨와 김해 김씨 그리고 광산 김씨가 약 150년 전에 들어왔다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 장등동, 맹동, 어운동 마을이 광주군 하대곡면에 속함.-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대곡면 어운, 복정리 각 일부는 운정리가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 석곡면 장등, 운정리가 됨- 1957년 7월 1일 광주시 망월출장소 관할 장등, 운정동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동구관할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지명- 도동논 : 용호마을에 들어오는 고개를 도동고개라 하는데 논이 이 고개 아래에 있다고 하여 도동논이라 불렀다.- 복다우 : 용호마을 왼쪽에 있는 곳을 복다우라 불렀다.- 핑룡굴산 : 용호마을 앞쪽에 있는 산을 말한다. 기타 엄통안에, 뒷골짝 밭 등의 지명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복다우마을▶ 마을의 유래 복다우마을은 원래 복정이라고 불렸으나 자세한 연유는 알 수 없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오래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살았었다 한다. 그 후로 70년 전에 표씨가 들어와 터를 잡았다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 장등동, 맹동, 어운동 마을이 광주군 하대곡면에 속함.-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대곡면 어운, 복정리 각 일부는 운정리가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 석곡면 장등, 운정리가 됨.- 1957년 7월 1일 광주시 망월출장소 관할 장등, 운정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석곡 출장소 장운동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동구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관할의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장운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충효동, 청옥동, 장운동은 신설된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안뫼골, 집마골 등의 지명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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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동
    ● 동명의 유래 柳洞은 광주읍성의 북문과 공북루로부터 서울 가는 가로변에 조성된 버드나무 숲에서 유래한다. 당시 이 부근에 살았던 문갑주씨는 공북루가 있던 광주일고 정문쪽에서 아세아극장과 북성중학교 정문과 나산클레프 입구쪽으로 지나는 길이 있는데 북성중 앞에서 나산클레프 앞 도로 부근에 100여미터 정도의 ‘버드나무’ 고목 숲길이 있어 행인들에게 시원함과 운치를 더해주었다 한다.이 숲은 규장각 소장 全羅右道光州地圖에 ‘柳林藪’(유림숲)이라 했고 광주시청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본 광주백년사』와 1999년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가진 ‘광주의 역사와 문화’ 기획전시회 때 ‘유림숲’의 사진이 전시되어 그 일부를 볼 수 있었다.때문에 마을 이름을 ‘柳林村’이라 불렀다하며 ‘柳林村’은 1935년 행정구역개편 때 ‘柳町’과 ‘林町’으로 나뉘었고, 柳町은 1948년 왜식 동명변경에 따라 柳洞이 되었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광주군 기례방면에 속함- 1947년 유동이라 부르기 시작함- 1957년 누문동과 함께 본청 직할의 유루동(柳褸洞)이 됨.- 1970년 유루동이 유동과 누문동으로 나뉨- 1997년 3월 1일 소규모 동 통합방침에 의거 유동, 북동, 누문동이 통합되어 중앙동 관할▶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장성백이 : 현 누문파출소 부근과 광주역 사이에 장성으로 가는 길- 버드레 : 광주천 주변으로 해서 자갈땅 부근을 말한다. 일제치하 당시 개간되어 뽕나무가 많이 심어졌고, 당시에는 누에와 생사를 생산하는 잠사장이 있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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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곡동
    ● 동명의 유래 日谷洞은 호구총수에 ‘一谷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光州郡 石堤面 日谷이라 하였고 1914년 日洞을 병합하여 일곡리라 하였다. 위의 설명을 보면 一谷과 日谷의 두 가지 표기가 혼동됨을 볼 수 있다. 一谷의 경우 ‘一’의 훈은 ‘하나’이지만 이 훈인 ‘하나’는 명사와 결합할 경우 ‘한’이 된다. 그런데 ‘한’이라는 음은 ‘크다’라는 뜻을 갖는 ‘한’과 동음이의어이다. 그러므로 ‘一谷’은 ‘하나의 골짜기’라는 의미와 ‘큰 골짜기’라는 두가지의 의미를 갖게 되는데 ‘큰골짜기’라는 지명일 경우 ‘한실’이라 불리게 된다.그러나 一谷보다 日谷이라는 표기가 원형이라면 ‘日’의 훈이 ‘날’이기 때문에 물줄기가 갈라지다라는 뜻과 동일한 나누어진다는 뜻을 가진 지명이 된다. 예를 들어 대지에 비가 내리게 되면 산마루에 내린 빗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물줄기를 이루는데 이렇게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결국 다른 물줄기와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합수되는 곳은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으로 인식하기도 하여 ‘갈’계 지명이 형성하게 된다. 이런 ‘갈’계 지명이 붙는 곳은 다시 ‘나누어진다’라는 의미에서 ‘날’계 지명으로도 불리는데 이 중 ‘날’계 지명 중의 하나가 ‘日谷’인 것이다.日谷洞은 一谷이 아니고 日谷이 본래의 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一谷’이 아닌 ‘日谷’과 관련된 지명이 주위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익산재(翼山-)가 그것이다. ‘익산재(翼山-)’는 ‘일곡에서 용두동으로 가는 고개’라 한다. ‘翼’은 훈이 ‘날개’이다. 그러므로 ‘날’은 ‘日’의 훈 ‘날’과 동일한 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말 ‘날’은 ‘日’과 ‘翼’자를 빌어 지명에 표기되고 있다고 생각되며 또한 이곳에는 ‘晩珠洞’이라는 골짜기 이름이 있는데 이곳은 ‘일곡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마을’이라 한다. ‘晩’은 훈이 ‘늦’이다. 그런데 이 ‘늦’은 ‘날’계 지명이다. 또 ‘날’계 지명으로 ‘노린적굴’이 있다. 이 ‘노린적굴’의 ‘노리’는 ‘날’의 변형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두 물줄기가 합수하는 곳의 이름으로 불리는 登村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登’은 훈이 ‘오르다’이다 그러나 뒤에 명사와 합성하여 쓰일 경우에는 ‘올’이라 한다. ‘올’도 물줄기가 합류되는 곳이고 ‘날’이나 ‘갈’계 지명도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의 지명인데 이들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서로 상통하는 지명어사이다. 그것은 옛날에는 큰 길이 없을 때 지대가 낮은 물줄기를 따라서 길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올 경우에는 아무 문제없이 목적지에 갈 수 있지만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갈 경우에는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을 만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현상적으로는 합류되는 곳일지라도 실제 일상 생활에서는 갈라지는 곳으로 인식하여 머리에 입력해야 하고 지명도 갈라지는 곳으로 명명하여 기억을 새롭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곡 · 일동(一谷 · 一洞)마을의 유래일곡동이 地名으로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 이다. 당시 기록에는 石堤里 一谷村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후 일제 때 石堤里 日谷리. 日洞리로 나타난다. 본래는 큰 마을이라 하여 '한실'이라 부르다가 마을이름을 漢字로 바꾸면서 '一曲'이라 했다가 一谷이 日谷으로 바뀐 듯 하다. 현재 일곡마을 노지섭씨가 소유하고 있는 고문서 중 <乾隆 57年, 盧彦一, 戶口單子>를 보면 北區 石堤一曲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건륭 60년 (1759년) 戶口單子에는 一谷으로 나타나다가 그뒤 日谷으로 기재되어 있다.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光山盧氏이다. 22세손인 欣東이 현 우치공원 맞은편에 있는 모산마을에 이주해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希瑞(1558 ~ 1592)의 묘가 일곡마을 뒷산 초장골(招葬洞)에 모셔져 있어 이때부터 대대로 터전을 마련했던 것 같다.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光山李氏 11세손인 楠(1603 ~ 1653)이 목포 달동네서 옮겨와 광산노씨와 함께 마을을 이루면서 살았다.▶ 마을의 지명- 가마보재[고개] : 일곡에서 내지로 넘어가는 고개.- 건너물[마을] : 일곡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 일부분.- 구상(坸像)[골] : 아홉무덤 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노린적굴[들] : 선상홍국 아래쪽에 있는 들.- 늑두굴[골] : 소소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동촌[마을] : 일곡마을- 만주동[골] : 일곡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 있었음. 만줄등 밑이 됨.- 만줄등(晩茁嶝) : 한새봉 아래에 있는 등성이.- 무등동 : 일동 서쪽에 있는 등성이.- 범안골 : 구상골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 선산홍굴[골] : 노린적굴 북쪽에 있는 골짜기. 선산안굴- 쇄소 골[골] : 노린적굴 남쪽에 있는 골짜기.- 수랑 골[들] : 서남쟁이 동쪽에 있는 들. 수랑이 많음.- 아홉무덤 봉[산] : 한새봉 북쪽에 있는 산. 본촌동 김씨묘가 아홉기가 있음.- 억산이 재[고개] : 일곡에서 용두동으로 가는 고개.- 장군대록 골[골] : 노린적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큰바위에 발자국이 있는데 장군이 지남녀서 디딘 것이라 함.- 잿봉[산] : 일동 서남쪽에 있는 산. - 저봉- 초장등[등] : 소소리 남쪽에 있는 등성이.- 큰갯 재[고개] : 일곡 북서쪽에서 용두리 거진으로 가는 고개.- 한새봉[산] : 일곡 북쪽 제일 높은 산 - 한시몰랭이- 한적곡[들] : 쇄소골 북쪽에 있는 들 - 노린적골- 후한봉 : 마을 뒤쪽에 있는 산-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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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동
    ● 동명의 유래 林洞은 광주읍성의 북문과 공북루로부터 서울 가는 가로변에 조성된 버드나무 숲에서 유래한다. 당시 이 부근에 살았던 문갑주씨는 공북루가 있던 광주일고 정문쪽에서 아세아극장과 북성중학교 정문과 나산클레프 입구쪽으로 지나는 길이 있는데 북성중 앞에서 나산클레프 앞 도로 부근에 100여미터 정도의 ‘버드나무’ 고목 숲길이 있어 행인들에게 시원함과 운치를 더해주었다 한다.▶ 마을의 유래林洞은 광주읍성의 북문과 공북루로부터 서울 가는 가로변에 조성된 버드나무 숲에서 유래한다. 당시 이 부근에 살았던 문갑주씨는 공북루가 있던 광주일고 정문쪽에서 아세아극장과 북성중학교 정문과 나산클레프 입구쪽으로 지나는 길이 있는데 북성중 앞에서 나산클레프 앞 도로 부근에 100여미터 정도의 ‘버드나무’ 고목 숲길이 있어 행인들에게 시원함과 운치를 더해주었다 한다.이 숲은 규장각 소장 金羅右道光州地圖에 '柳林'(유림숲)이라 했고 광주시청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본 광주 백년사』와 1999년 광주민속박문관에서 가진 '광주의 역사와 문화' 기획전 사회 때 '유림숲'의 사진이 전시되어 그 일부를 볼 수 있었다. 때문에 마을 이름을 '柳林村'이라 불렀다 하며 '柳林村'은 1935년 행정구역개편 때 '柳町'과 '林町'으로 나뉘었고, 林町은 1948년 왜식 동명변경에 따라 林洞이 되었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 기례방면에 속함- 1947년 임동이라 부르기 시작- 1986년 광주직할시 북구 임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임동 : 버드리, 유림촌(柳林村)- 용곡  : 무등경기장 뒤편에 위치한 마을지명-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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