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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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등동
    ● 동명의 유래 장등동(長嶝洞)은 본래 광주군 하대곡면의 지역으로서, 긴 등성이 밑이 되므로 장등 또는 장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복정리 일부와 오치면의 문산리 일부와 상대곡면의 용호리를 병합하여 장등리가 되었다. ‘장등’은 대개 ‘긴 등성이’가 있다하여 ‘長嶝’이라 표기하는 곳이 대다수이지만, ‘長嶝’ <전남 나주군 노안면 양천리>과 ‘長燈’<전남 여천군 화양면 장수리>으로 표기하는 곳도 있다. 또한 市場이 섰다하여 ‘場登’ <전남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과 ‘市嶝’ <전남 해남군 현산면 월송리>으로 표기하는 곳도 있다.이곳의 ‘長嶝’은 ‘長燈’으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長嶝’이 바른 표기라면 이곳에 ‘긴 등성이’가 있어야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지리적 환경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城들’이라는 들 이름이 있다. 그러므로 혹 이곳에 긴 城이 있어 이로 인하여 ‘長嶝’이라는 지명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장등(장동)마을의 유래장등마을과 장동마을은 원래 한 마을이였다. 2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다 보니 행정상 편의를 위해서 일제시대 때 분리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유래는 풍수지리학설에 의하면 '벽에 긴 등을 달아놓은 형상인 장등개벽'이란 명당이 있다고 하여 풍수지리학자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이곳에 1986년 한국 전력 변전소가 들어서 '등(燈)자(字)' 땅이름을 실감케 했다. 고려시대 이후로 이곳은 담양으로 속하지 않고 광주로 속했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 장등동, 맹동, 어운동 마을이 광주군 하대곡면에 속함.-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대곡면 어운, 복정리 각 일부는 운정리가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 석곡면 장등, 운정리가 됨.- 1957년 7월 1일 광주 망월출장소 관할 장등, 운정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석곡 출장소 장운동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동구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관할의 석곡출장소 장운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장운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충효동, 청옥동, 장운동은 신설된 석곡동이 됨.▶ 마을에 내려오는 지명골짜기의 이름을 본떠서 장동골, 가장골, 아시아골, 금막골, 바우배기, 산정내, 금치골, 돌고개, 모래골, 범바우, 너문함태, 살망태, 고자배기, 안골, 순산재, 도독골, 왕솔엽등, 탑골(예전에 탑이 있었던 절터) 등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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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흥동
    ● 동명의 유래 중흥동(中興洞)은 본래 광주군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모롱이, 중가리와 계천리, 이동리, 병문리, 대가리, 효죽리의 각 일부와 기례방면의 태봉리, 누암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중흥리라 해서 서방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효죽동의 관할이 되었다가, 1979년 중흥동이 되었다. 그러므로 중흥동은 예로부터 불려온 지명이 아니라 1979년에 불린 지명이므로 이 지역이 더욱 발전하도록 기원하는 의미에서 ‘中興’이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유래이 지역에는 한 복판에 간뎃골, 동편에 모롱골, 북녘에 진고살마을이 있다. 모롱골 북녘에는 시냑골, 병문리마을이 있었다 1625년 인조 때의 왕자 태를 장사 지냈다는 태봉산(52m) 북녘 기슭에 태봉마을이 있었는데 1967년 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 매립에 이용했으므로, 지금의 광주역 서편 도로에 있던 태봉산의 흔적은 차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중흥3동은 조선시대에 조성되었으며, 이 지역에 많이 있던 비석은 서동의 향교로 옮겨갔다. 또한 우리 마을 고장 이름이라 해서 경양9골이라 했는데 큰샘골, 솔댁골, 관댁골, 점모실, 신악골 등이 있었다. 당뫼는 중흥3동 동사무소 쪽이고, 큰잔릉은 동신고 있는 쪽이며 범두고개는 동신고에서 효죽동우체국 사이라고 한다. 중흥동은 이웃 우산동 383번지에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경양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큰 마을이었다. 구한말 일제에 의해 역의 기능(驥機)이 상실되면서, 광주 외곽의 근교 농촌이었다가 1969년 광주 철도역이 옮겨오면서 역전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지금의 역전 통인 중흥1동과 역 뒤 중흥2,3동이 철길에 의해 갈라져 있다.▶ 마을의 연혁- 조선시대 이웃 우산동 383번지에 있었던 경양역을 기반으로 형성- 조선후기 광주군 경양면에 속함.- 1914년 중가리와 신흥리의 이름을 따서 중흥리라고 칭함.- 1955년 중흥동으로 개칭됨.- 1957년 122개 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풍향동, 우산동과 함께 효죽동이 됨.- 1969년 광주역이 옮겨오면서 역전 시가지가 조성된 지역으로 동구 효죽동에서 분동됨.- 1979년 5월 1일 중흥동이 중흥1, 2동으로 분동- 1982년 9월 1일 중흥2동에서 중흥2, 3동으로 분동▶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간뎃걸(간뎃골) : 중흥동 복판에 있는 마을.- 모른걸 : 모롱골, 모롱리(毛弄里) 간뎃걸 동쪽에 있는 마을.- 병문(屛門)안(병문리) : 시냑굴 북쪽에 있는 마을.- 사랫몰(사른물) : 가랫몰 북쪽 들에 있던 마을.- 시냑굴(시낙골) : 모른걸 북쪽에 있는 마을.- 신중흥(新中興) : 중흥동 옆에 새로 된 마을.- 진고샅 : 간뎃걸 북쪽에 있는 마을. 긴 고샅 옆이 됨.- 태봉(太峯, 胎峯) : 태봉 밑에 있는 마을.-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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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야동
    ● 동명의 유래  지야동(芝野洞)은 본래 광주군 갑마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대야리, 지산리와 우치면의 용전리, 지내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지산과 대야의 이름을 따서 지야리라 하였다한다. 『호구총수』지명에는 甲馬保面에 ‘池山’ 마을이 있다. 이 지명은 1914년『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의 자료에 ‘芝山’이라 바뀌어 표기되고 있다.또『호구총수』를 보면 牛峙面에 池內里가 있는데 1914년『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의 자료에도 그대로 ‘池內’로 표기되고 있다. 따라서 이곳 ‘芝野洞’은 이곳에 ‘못(池)’이 있어 명명된 지명이라 생각되며, 현재 이곳에는 ‘大野堤’라는 큰 저수지가 있으니 옛날에는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았겠지만 못이 있었기에 ‘池內’와 ‘池山’이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매우 큰 들이 형성되어 있다. 때문에 ‘큰 들’이라는 의미에서 ‘大野’라 부른 지역 이름이 생겼음은 당연하다 생각한다.* 지야(芝野)마을▶ 마을의 유래숲 속에 있는 넓은 들이라 하여 지야라고 불려졌다고도 타지역 사람들은 저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드릅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배가 떠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지야라고 불려졌다는 설도 있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전주 이씨로 350년 전 담양에서 건너와 거주했다 한다.▶ 마을의연혁-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기록에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대야 지내촌 지야촌이 나타남-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우치면의 용전, 지내리, 갑마보면의 대야 지산리 각 일부지역이 본촌면 관할의 지야리가 됨.- 1935년 10월 1일 광산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관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지산출장소 지야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동을 51개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이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우치동, 삼소동, 본촌동이 합쳐져서 건국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시암 배미 : 논에 샘이 있다고 하여 시암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둔벙 배미 : 논안에 저수지 같은 둔벙이 있다고 해서 둔벙배미라 한다.- 비단 배미 : 논이 비단처럼 곱고 기름지다고 하여 비단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뛰안 논 : 논 사이에 고랑이 있어서 논 사이는 뛰어 넘어 다녔다고 하여 뛰안 논이라 불려졌다 한다.- 긴배미 : 논이 길다고 해서 긴 배미라 불리워졌다 한다.- 구부렁 배미 : 논이 구렁이 처럼 구불구불하다고 하여 구부렁 배미라고 한다.- 뽕나무 배미 : 논 주위에 뽕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뽕나무 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사다리 배미 : 논이 사다리 모양처럼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다하여 사다리 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높은 배미 : 논의 지대가 높아서 높은 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벌 고개 : 고개에 벌이 많이 있다고 해서 벌고개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착지 머리 : 근처에 제방이 있어서 착지 머리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안 뫼산 : 산이 마을 앞에 있어서 안 뫼산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혼바지들 : 들에 있는 논의 토질이 비옥하지 못하다 하여 혼바질이라 불려졌다 한다.* 지산(芝山)마을▶ 마을의 유래옛날에 이곳이 바다 상류지역이라 하여 지산이라는 마을로 불려졌다하며 그 근거는 산적골 고개를 넘어가던 배가 이 곳에서 파손되었다고 한다. 또한 논을 파보면 아직도 뻘이 나온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성씨는 탐진 최씨로 약 200년 전에 창평을 거쳐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기록인, 호구총수(1789), 의 동면 항목에 지금이 이 마을로 보이는 지산촌이 나타남-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때 갑마보면의 지산리가 본촌면 관할 지산리에 편입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지야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 우치,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장사리 : 논가에 있는 도랑이 길에서 장사리라 불려졌다 한다.- 맹골 : 논 주변에 큰 방천이 있어서 맹골이라 불려졌다 한다.- 망태 배미 : 쌀 한망탱이와 논 900평을 바꿨다해서 망태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두비 배미 : 논 모양이 둥그렇고 크다는 의미에서 두리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기타 별개, 아래띠미, 우띠미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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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풍동
    ● 동명의 유래 청풍동(淸風洞)은 본래 광주군 상대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리, 등촌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깊은 산골로 맑은 물이 흐르므로 청풍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淸風洞은 깊은 산골이므로 부른 이름인데 청풍동의 중심 마을은 상대곡면의 상대곡인 웃대실이라 부르는 登村마을이므로 登村의 ‘登’은 훈이 ‘오를’이므로 이를 줄여 읽으면 ‘올’이 된다. 지명에서 ‘올’은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에 合을 뜻하는 ‘얼’이 ‘올’로 발음되며 생긴 지명으로 이는 훈이 같은 ‘登’자를 취하란 지명이다. 그리고 이곳에 ‘핑고등’이라는 등이 있는데 ‘핑고등’은 ‘빙고등’으로 ‘永’은 훈이 ‘얼’이니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에서 생긴 지명인 것이다.* 신촌(新村)마을▶ 마을의 유래예전에 상대실에 속해있던 마을로 등촌마을 옆에 새롭게 생겨난 마을이라고 해서 신촌마을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마을의 성촌 시기는 약 500여 년 전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이전에 벼슬을 하던 신재공 남평 문씨와 복제 기씨가 이쪽으로 귀향와서 생활하다가 예전에 이곳에 있던 서당에 공부하러 왔다가 이 곳의 터를 좋게 여겨서 호가 신재공인 남평 문씨와 기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남평 문씨의 자작일촌이었으나 최근에는 여러 성씨들의 유입으로 산성촌이 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연혁- 청동기 시대 : 망월동 분토마을에 8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 이 지역은 광주군 상대곡(윗대실) 속했다. 당시 이곳에 분토동, 신촌, 등촌, 화암촌이 있었음.-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 등촌리 각 일부는 청풍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청풍, 망월, 화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광주군 망월 출장소 관할 청풍, 망월, 화암동이 됨. 광주 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석곡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망월출장소를 설치함.- 1957년 12월 2일 광주시 석곡 출장소 관할 청옥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화암, 망월, 청풍동은 석곡출장소 청옥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청옥동은 동구 관할이 됨. 이때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동부,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를 둠.-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청옥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이 때 석곡, 지산출장소를 없앰.-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도장골 : 도장모양을 닮은 바위가 있던 곳을 말한다.- 소골(우골) : 논에 소를 많이 메워두었다는 곳을 말한다.- 쇠코배미 : 논의 모양이 소의 코를 닮았다고 해서 쇠코배미라 부른다.- 죽배미 : 논의 -죽과 바꿨다고 한다.- 꽃남정 : 꽃나무 정자가 있었다는 곳을 말한다.- 불당골 : 불당이 있었다는 골짜기를 불당골이라 불렀다.- 불당골재 : 불당에서 신촌으로 가는 고개를 말한다. 기타, 쇠골, 혼독골, 비암술산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등촌(灯村)마을 ▶ 마을의 유래이 마을을 예전에는 웃대실, 상대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금은 등촌이라고 한다. 마을의 유래에 대해 어떤 설로는 마을 앞산인 덕봉산을 무등산으로 보면 이 마을이 덕봉산의 등에 해당된다고 하여서 등 배촌(背村)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은 임진왜란 때의 김해 김씨로 알려져있다.▶ 마을의 연혁- 청동기 시대 망월동 분토마을에 8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이 지역은 광주군 상대곡(윗대실) 속했다. 당시 이곳에 분토동, 신촌, 등촌, 화암촌이 있었음.-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 등촌리 각 일부는 청풍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청풍, 망월, 화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광주군 망월 출장소 관할 청풍, 망월, 화암동이 됨. 광주 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석곡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망월출장소를 설치함- 1957년 12월 2일 광주시 석곡 출장소 관할 청옥동이 됨. 122동을 51개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화암, 망월, 청충동은 석곡출장소 청운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청옥동은 동구 관할이 됨. 이때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동부,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서구를 둠-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청옥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이 때 석곡, 지산출장소를 없앰-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돼지 배미 : 흉년에 돼지와 바꾸었다고 하는 논- 덕봉산 : 덕을 바라고 빌었다는 산- 배틀바우 : 배틀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 대밭골 : 대밭이 있었던 골짜기- 독다리 : 마을앞의 예전에 돌다리가 있었다고 함. 지금의 등촌교를 말함- 가매바우 : 가마처럼 생긴 바위- 가매보 : 가매 바위옆에 있는 보- 너븐보 : 보가 넓어서 너븐보라고 불려졌던 보- 비암쑤 : 뱀처럼 생겼던 소- 비암쑤 보 : 비암쑤 아래에 있는 보- 새다리 배미 : 논의 모양이 새다리같이 생겨서 새다리 배미라고 불려졌다.- 숲쟁이들 : 예전에 숲이 우거져 있던 들- 옻밭골 : 옻나무가 많았던 골짜기- 장구 배미 : 장구처럼 가운데가 잘록한 논을 장구 배미라고 불려졌다.- 중리보 : 마을 앞들 가운데에 있는 보. 기타, 개뚝배미, 속곳배미, 함박골, 구리소, 이시보 등이 있다.* 분토(粉土)마을▶ 마을의 유래분토마을은 예전부터 분토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분토마을이라 불려졌다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400년 전에 임진왜란을 피해서 이곳으로 온 홍주 석씨로 전해진다.▶ 마을의 연혁- 청동기 시대 망월동 분토마을에 8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이 지역은 광주군 상대곡(윗대실) 속했다. 당시 이곳에 분토동, 신촌, 등촌, 화암촌이 있었음.-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 등촌리 각일부는 청풍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청풍, 망월, 화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광주군 망월 출장소 관할 청풍, 망월, 화암동이 됨. 광주 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석곡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망월출장소를 설치함- 1957년 12월 2일 광주시 석곡 출장소 관할 청옥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화암, 망월, 청풍동은 석곡출장소 청옥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청옥동은 동구 관할이 됨. 이때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동부,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를 둠-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청옥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이 때 석곡, 지산출장소를 없앰-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뒷들골 : 분토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를 뒷들골이라 부른다.- 정지뫼 : 경렬공 정지 장군의 묘가 있다고 하여 불려진 산이름을 말한다.-  대사골 : 예전에 대사가 태어났다고 해서 대사골이라 불렀다 한다.- 큰 골 : 예전에 이곳에 큰절이 있었다하여 큰골이라 불렀다 한다. 기타 당산골 등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 죽곡마을▶ 마을의 유래죽곡마을은 대나무가 많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죽곡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이 마을의 형성시기는 350여년 전으로 해주 오씨 오계옥씨가 병자호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피난 와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기씨들이 250여년 전에 들어와서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청동기 시대 망월동 분토마을에 8기의 고인돌이 본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서 시대 이 지역은 광주군 상대곡(윗대실) 속했다. 당시 이곳에 분토동, 신촌, 등촌, 화암촌이 있었음.-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 등촌리 각일부는 청풍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청풍, 망월, 화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광주군 망월 출장소 관할 청풍, 망월, 화암동이 됨. 광주 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석곡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이 편의를 위해 망월출장소를 설치함- 1957년 12월 2일 광주시 석곡 출장소 관할 청옥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화암, 망월, 청풍동은 석곡출장소 청옥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청옥동은 동구 관할이 됨. 이때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동부,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를 둠-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청옥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이 때 석곡, 지산출장소를 없앰-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옛부터 전해내려 오는 지명- 죽 배미 : 논을 팔때 흥정을 하면서 -죽을 끊여 먹었다는 논이라 하여 -죽 배미라 한다.- 통배미 : 논이 둥그렇다고 해서 통배미라고 한다.- 뫼봉 : 예전 이곳이 바다였을 때 배가 들어오면 배를 묶어 놓았다는 곳이라 한다.- 기타 쌍가마골, 허정골 등이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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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효동
    ● 동명의 유래 충효동(忠孝洞)은 본래 광주군 석저면의 지역으로서 성안 또는 성내, 성촌이라 부르다가, 조선 제22대 정조가 선조 때의 충신ㆍ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생장한 곳이라 하여 충효리로 사명하여 불린 이름이다.* 닥메(柚山)마을▶ 마을의 유래닥메마을은 마을 뒷산의 모습이 닭의 모양을 닮아서 닭뫼라고 하였다고 한다. 닭뫼가 차츰 와전되어 닥메라고 불려졌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유산(柚山)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은 인천 서씨로 중종 때 앞마을인 담양의 지실마을의 서당 훈장으로 왔다가 이곳을 잠깐 들렸는데 마음에 들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청동기 시대 : 충효동 성안마을 7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 시대 : 개산사 석등 명문을 보면 서기 891년 이 일대 이름을 석보저였다.- 조선 시대 : 이 지역은 광주군 석보면에 속했다. 당시 이곳에 이촌, 본촌, 성촌, 평촌, 서림촌, 신촌이 있었음-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홍정자 : 마을 옆으로 지금의 논 중간에 서있는 나무로 과거 그 옆에서 농사를 짓던 홍씨라는 농부가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하여 홍정자라고 불려진다- 옥 배미 : 평뭇들 동쪽에 있는 논으로 서마지기 인데 옛 평무고을의 옥터였다고 하여 옥배미라고 한다.- 구시 시암 : 평뭇들 북쪽에 있는 샘으로 구시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구시시암이라고 한다.- 꾀꼬리봉 : 산의 형세가 꾀꼬리모양을 닮아서 꾀꼬리봉이라고 한다.- 함충제 : 꾀꼬리가 벌레를 물어가는 형상을 한재를 함충제라고 한다.- 급다리 : 닥메 서쪽에 있는 다리로 김윤제가 값진 돌로 놓은 징검다리라고 하여 이를 금다리라고 한다.- 금다리 보 : 금다리 옆에 있는 보를 금다리 보라고 한다.- 금다리 소 : 금다리 밑에 있는 소를 금다리 소라고 한다.* 담안마을▶ 마을의 유래예전에 이 마을의 주변은 큰 장이 섰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곳 장은 주위로 담을 쌓아올려서 경계를 표시했다고 하는데 담안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이 시장의 담장 안쪽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부르다가 차츰 마을을 이루게 되어 이 마을을 담안 마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이 마을이 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일 것이다.▶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구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동림(東林)마을▶ 마을의 유래 동림마을은 꾀꼬리가 많아서 자주 마을의 동쪽 수풀에서 꾀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동쪽 수풀에 꾀꼬리가 앉아 운다고 하여 동림마을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은 400여년 전에 연일 정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구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서틀바우 : 무등산 꼭대기에 바위가 서있다고 하여서 서틀바위라고 한다.- 평뭇들 : 산골짜기에 넓은 들이 있다고 하여서 평뭇들이라고 한다.- 금산 : 마을 뒷산으로 금이 나온다고 금산이라고 불렀다. 기타로 천명둑, 동리보, 매봉산, 닭맷똥산, 장안봉 등이 있다.* 버성골(友聲)마을▶ 마을의 유래해마다 5~6월이면 뒷산의 꾀꼬리가 벗을 찾아 울어대는 마을이라고 해서 버성골이라고 하였으며 한자로 표기하여 우성(友聲)마을이라고도 한다. 버성골마을은 약 400여년 전에 정철의 후손인 연일 정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황새바위 : 버성골의 앞쪽에 있는 산의 형국이 날개를 펼친 학모양이라고 하여서 황새바위라고 한다. 기타 금산, 황새고라실, 황새모퉁이, 우렁바위 등이 있다.* 환벽마을환벽마을의 주변은 가사문화권으로 조선시대의 여러 정자가 산재되어 있다. 이 마을에도 환벽당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의 주변으로 푸른 대나무가 많아서 벽처럼 정자를 두르고 있어서 환벽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이 환벽당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환벽마을이라 불려졌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형성한 사람은 원래는 성안 마을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성안에서 이 곳으로 이주하여 이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환벽당 : 조선시대 김윤제가 지은 정자를 말한다.- 용소 : 예전에 사촌 김윤제와 정철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라고 전해지는 창계천이 있는 소를 말한다.* 수리(水里)마을▶ 마을의 유래수리(水里)마을은 예전에는 마을이 개의 형국을 닮아서 술리마을이라고 불려졌다고 하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술리마을이 점차적으로 와전되어 수리마을로 불려졌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광산 김씨로 충장공 김덕령의 후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구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옛부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 죽배미 : 흉년 밥그릇이라고 불려졌던 논으로 아무리 큰 흉년에도 이 논에서 많은 곡식이 나와서 이 논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흉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는 논을 죽 배미라고 한다.- 흉년밥그릇 : 죽 배미의 다른 이름을 말한다. 기타 맞밭둘 등이 있다.* 석저(石底)마을▶ 마을의 유래이 마을의 주변에는 돌이 많아서 마을 어디에서나 돌을 볼 수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이 마을을 부르는 이름이 돌과 관련된 석재, 석보, 돌밑이라고 불려졌다. 흔히 지금은 돌밑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석저(石底)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된 시기는 약 300여년전으로 광산 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20여 가구로 최씨, 김씨, 박씨, 이씨 등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마을의 연역-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본촌 덕의리 각 일부는 덕의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의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구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열시 배미 : 논이 길어서 열시 배미라고 불려졌다.- 갈모 배미 : 모자(갈모)를 닮은 논을 말한다.- 말리봉 : 산의 높이가 높아서 만리까지 보인다는 산의 봉우리를 말한다. 기타로 뒷골, 북당산, 데실제, 고가메 등이 있다.* 북촌(北村)마을▶ 마을의 유래무등산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 마을이 북촌을 향하고 있다고 하여 북촌마을이라고 했다고 알려져 왔다. 북촌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으며, 현재 광산 김씨의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옛부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 기와 배미 : 예전에 이 곳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한다(현재 충효분교 앞의 논)- 옥 배미 : 이 곳에 예전에 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맞바우 : 금다리 봇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칠성바우 : 맞바위 안에 칠성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로 수몰되어 버렸다한다. 기타로 백간당 등의 지명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성안(城內) 마을▶ 마을의 유래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마치 성의 안쪽에 있는 마을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성안 또는 성내마을, 안터마을이라고 불린다. 조선 정조 때 충장공 김덕령의 출생지로 22대 정조가 1788년 충장공과 그의 부인 홍양 이씨의 충절을 기려 충장리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마을의 성촌시기는 500여년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은 노씨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광산 김씨가 조선초기 서창에서 옮겨와 살았으며 현재는 광산 김씨가 주로 살고 있으며 17대에 이른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맛바우 : 마장이 있었다는 곳을 말한다.- 얜구부 :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논을 얜구부라 불려졌다.- 우무실 : 성안에 있는 들을 우무실이라고 불려졌다.- 송곳 배미 : 논의 모양이 송곳을 닮아서 송곡배미라고 불려졌다. 기타로 동림보, 사용보, 상창들 등이 있다.* 산장(山藏) 마을▶ 마을의 유래산장마을은 근래에 형성된 상가촌과 그 위의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원주민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원주민 마을은 광주시가 생기기전에 최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서 원주민 마을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원주민 마을은 이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원효사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동구였으며 원효사가 생길 때 주민들이 하나둘 몰려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원효사와 같은 시기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원촌, 서촌, 이치(배재)리 상대곡면 화암리 일부는 금곡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이리가 됨.-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 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ㅊ어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누에봉 : 누에같이 생긴 산의 봉우리를 말한다.- 의상봉 : 의상대사가 공부를 했다는 굴이 있는 산의 봉우리를 의상봉이라 부른다.- 까치봉 : 까치의 머리를 닮은 산의 봉우리를 까치봉이라 부른다.- 시루봉 : 떡 시루를 닮은 산의 봉우리를 말한다. 기타 감나무골, 삼바실, 주검동, 꼬막재, 늦재, 바람재, 토끼봉 등이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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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령동
    ● 동명의 유래 태령동(台嶺洞)은 본래 광주군 우치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단지리와 두촌리, 희룡리, 학촌리의 각 일부와 담양군 우면의 광신기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태령리라 하였는데,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긴동이다.이곳에는 조수고개(朝水-), 일명‘조시갯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는 태령동과 담양군 봉서면 양지리 경계에 있는 고개다. 태령동은 이 고개로부터 불린 지명으로 台嶺의 台는 그 뜻이 크다이고, 嶺은 고개를 뜻하는 말이므로 ‘큰 고개’라는 의미에서 불린 이름이라 추정된다.* 입암(立岩)마을▶ 마을의 유래이 마을의 모습은 마치 떠있는 배의 형국이라고 하는데, 배가 떠있으면 자연히 위태한 모습이겠지만 삼각산의 줄기(마을의 뒷산)가 이 배(입암마을)를 붙들고 있어서 풍수지리상으로 안전한 지형이라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마을을 형성한 사람들은 아마도 어부였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마을은 약 400여년 전에 김해 김씨가 처음 터를 잡아서 이 마을을 형성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누가 어? 경유로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이 마을이 입암 마을로 불려지게 된 것은 들판 한가운데 한 길 반정도 되는 바위가 서있는데 이 바위를 예사롭지 않게 생각한 옛 조상들에 의해서 입암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우치면, 입암, 신평, 용강, 동작, 서작, 종방 등 각 일부는 용강리가 되어 광주군 우치면에 속하게 됨.- 1932년 11월 1일 우치면과 본촌면이 병합됨에 따라 지산면, 생룡, 용강, 효령, 수곡, 태령 등이 용전리가 됨.- 1957년 11월 6일 광산군 지산면 16개리가 광주시로 편입될 때 광주시 생룡, 용전, 용강, 효령, 태령동이 됨.- 1957년 12월 1일 지산출장소 관할 우치동이 됨. 121개동을 51개동으로 축소운영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우치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 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하여 건국동 설치하여 현재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도치 배미 : 논의 모양이 마치 도끼처럼 생겨서 부르게 된 논 이름- 구렁골 배미 : 논이 아주 깊고 발이 빠질 정도로 질척했다는 논.- 시정 배미 : 논 옆에 시정이 있었다고 한다. - 주검내 :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지역.- 한걸음 길 : 사방으로 길이 뚫려있었다는 길. (길옆으로 4~5가구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한걸음 방앗간 : 한걸음 길옆에 있던 물방앗간- 선바위 : 바위가 서있는 들- 정자골 : 정자나무가 있었다는 곳.- 검바위 : 입암 동쪽에 있던 바위로 검은색의 바위가 있었던 곳. * 두촌(斗村)마을▶ 마을의 유래두촌마을이라 불리게 된 자세한 연유는 알 수가 없으나 마을 형상이 말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어서 두촌이라 불려졌다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죽산 박씨로 약 400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한다. 마을이 번성하였을 때는 20여가구가 모여 자작일촌 하였으나 현재는 5가구만이 살고 있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폐합에 따라 두촌이 태령리가 되어 광주군 우치면에 속함- 1932년 11월 1일 우치면과 본촌면이 병합됨에 따라 지산면 태령리가 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 태령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하여 건국동이 설치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우렁배미 : 논에 우렁이 많아서 우렁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길대배미 : 논이 길어서 길대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요강배미 : 논 모양이 요강처럼 생겼다 하여 요강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단지(丹芝)마을▶ 마을의 유래단지마을은 원래 단저라고 불렀으며 금반오호 라고도 했다. 이것은 마을 형세가 마치 술단지 처럼 생겼다하여 이렇게 불려졌다 한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전주 이씨로 약 400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단지리가 태령리가 되어 우치면에 속함- 1932년 11월 1일 우치면과 본촌면이 병합됨에 따라 지산면 태령리 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 태령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하여 건국동이 설치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장구배미 : 논 모양이 장구처럼 생겼다하여 장구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새기배미 : 논을 시암으로 사용해서 새기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옥녀봉 : 마을 뒷산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이라 불렀다 한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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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향동
    ● 동명의 유래 북구 풍향동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사리 鄕校와 豊嶝里과 古鄕校의 이름을 따서 생긴 이름이다. ‘광주향교지’에 따르면 고려 공양왕 때(1390년) 정당문학박사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시중이 되어 서울에 5부학당과 각 고을에 향교를 세웠다.광주향교는 공자의 도의사상과 인본주의의 교육정책에 따라 1392년 무렵 瑞石山의 壯元峯 西麓下(무등산 잣고개 너머)에 건립되었다가 호환(虎患)이 생겨 광주읍성의 동문내로 옮겼다. 이후 성종 19년(1488년)에 현감 권수평이 구동에 이건 하였으나 임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3년에 중건했다한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옛날 성안에 있었는데 현감 권수평이 이곳이 낮고 습하고 좁고 퇴락하여 부로(父老)에게 권하여 옮겼다는 成俔의 記가 소개되어 있다.그러나『한국지명총람』에는 향교는 현 풍향동의 고사(古沙) 마을에 있었고 이 마을은 일명 ‘고새, 고새기, 고생기, 고향교, 고향교리’라 하여 풍향동에서 으뜸 마을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古沙里의 鄕校와 豊嶝里를 병합하여 豊鄕里라 하여 서방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고, 1979년 풍향동이 되었다한다.대개 ‘鄕校’가 있는 마을을 부를 때 ‘향(鄕)’을 ‘생’이라 발음하고 ‘교(校)’를 ‘계’ 또는 ‘기’라 발음하여 ‘생계ㆍ생기’라 부르는 지역이 많다. 이를 감안하면 ‘古鄕校’를 ‘고생기>고새기>고사’라 부르는 현상은 자연스런 현상이니 향교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가는 확실하게 밝힐 수 없지만 ‘豊鄕洞’이란 지명의 ‘鄕’은 鄕校에서 유래한 지명임이 확실하다 생각한다.▶ 마을의 유래 1914년 풍동리와 고사리(고향교)의 이름을 따서 풍향리로 칭하게 되면서 풍향동의 전래를 찾을 수 있다.풍향동은 장원봉에서 서북쪽으로 나즈막히 내려오는 능선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광주향교 옛터 자리에는 고사동네가 있었고 서편에는 풍동이 있었다. 이 일대는 우산동에 있었던 경양역 운영비를 자급하기 위한 역둔토가 있던 곳이다. 방죽밑들, 중시암걸의 둔토는 언더에서 내려오는 시냇물과 계림동의 경양방죽에서 물을 대어 경작했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이 지역은 광주군 서방면에 속했으며, 당시 이곳에 잔풍마을이 있었음.- 1914. 4. 1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방면 豊洞(풍동)리와 古沙(고사)리 는 瑞坊(서방)면 豊洞(풍동)리가 됨.- 1935. 10. 1 광산군 서방면 풍향리가 됨- 1995. 7. 1 光州(광주)시 豊鄕出張所(풍향출장소) 관할 豊鄕洞(풍향동)이 됨 (豊鄕洞호칭 개시) 광주광역시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서방면이 광주시로 되면서 주민 편의를 위해 풍향출장소 설치- 1957. 12. 2본청직할의 孝竹洞(효죽동) 관할 법정동 됨- 1961. 3. 10 북부출장소 관할이 됨- 1970. 7. 1 효죽동에서 분리되어 풍향동이 됨- 1973. 7. 1 區制(구제)실시에 따라 풍향동은 東區(동구) 관할이 됨(1973.3.12. 대통령 제 9630호)- 1979. 5. 1 풍향1,2동으로 분동됨- 1980. 4. 1 東區(동구)관할의 풍향동은 신설 된 北區(관할)이 됨- 1986. 11.1 광주직할시 북구 풍향1, 2동이 되었으며,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전라남도에서 떨어져 나옴- 1997. 3. 1 풍향 1,2동을 통합하여 오늘에 이름▶ 마을의 옛 지명- 강당(講堂) [들] : 서남쪽에 있는 들. 강당이 있었음- 고사(古沙) [고새, 고새기, 고향교, 고향교리] [마을] : 풍향동에 으뜸되는 마을. 광주 향교가 있었음- 방죽밀[들] : 풍동 남쪽에 있는 들. 계림동의 경양방죽 밑이 됨.- 줄시암[우물] : 줄시암걸에 있던 우물. 줄(풀)이 많이 났었음.- 풍동(豊洞)[마을] : 고사 서쪽에 있는 마을.-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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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암동
    ● 동명의 유래  화암동(花岩洞)은 본래 광주군 상대곡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곶으로 되고 바위가 있으므로 꽃바우 또는 화암이라 하여 불린 지명이다.花岩마을은 작고개에서 수원지 지나 충장사를 못 미쳐 가면 전상의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가 있는데 바로 이 마을의 이름이다. 이곳은 배제와 헬몬수양관 방향과 충민사 사당 아래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물줄기가 합류되어 제4수원지로 흘러가는 곳이다. ‘곶’은 대개 지형이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쭉 내민 곳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물줄기가 합수될 때 두 물줄기 사이가 좁을 경우 두 물줄기 사이의 땅이 마치 삼각형 모양으로 쑥 내밀게 되는데 이곳을 곶이라 말한다. 이곳은 이렇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이라서 ‘곶’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다가 ‘곶’이 경음화 되면서 ‘꽂’으로 발음되자 ‘花’자를 빌어 표기하면서 ‘花岩’이란 마을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화암(花岩)마을▶ 마을의 유래화암마을은 꽃과 바위가 많아서 화암마을이라고 불려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마을의 유래는 예전에 송제민의 아들 송 타가 이 마을에 살면서 집 앞에 있던 바위 주변에 백일홍 나무를 많이 심어놓고 이곳을 화암당이라부르고 자신의 호도 화암이라고 부른 데서 이 곳 마을을 화암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보성 안씨로 약 200여년 전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현재는 살고 있지 않고, 이 후에 광산 이씨가 들어와서 살게 되었으며 광산 이씨가 번창하여 대대로 살아오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 마을의 연혁- 조선 시대 이 지역은 광주군 상대곡(윗대실) 속했다. 당시 이곳에 분토동, 신촌, 등촌, 화암촌이 있었음.-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대곡면 화암, 등촌리 각 일부는 화암일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청풍, 망월, 화암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년 7월 1일 광주군 망월 출장소 관할 청풍, 망월, 화암동이 됨. 광주 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석곡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망월출장소를 설치함.-1957년 12월 2일 광주시 석곡 출장소 관할 청옥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화암, 망월, 청풍동은 석곡출장소 청옥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청옥동은 동구 관할이 됨. 이때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를 둠.-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청옥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이 때 석곡, 지산출장소를 없앰.-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되어 석곡동이 됨.▶ 옛부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 속곳배미 : 예전에 아주 가난하던 시절에 논과 여자 속곳을 바꾸어서 속곳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죽배미 : 예전에 가난해서 논과 죽 한그릇에 논을 바꿨다고 하여서 죽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산곡재 : 산에서 내려오는 물론 농사를 지었다고 하여 산곡재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삼골 : 삼을 키워서 모시를 짜내었다는 곳을 말한다.- 뫼산 바위 : 마을 뒤쪽 산에 바위 옆에 물통이 있었는데 이 곳에 있는 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법당배미 : 논의 터에 법당이 있었다고 하여서 법당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백토고개 : 고개에 있는 흙이 백토라서 백토고개라고 하였다.- 꽃밭등 : 진달래가 많이 피었다는 산등성이를 말한다.- 높으메 : 산의 봉우리가 높아서 높으메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덕석바우 : 바위의 모양이 덕석을 펴놓은 것처럼 생겨서 덕석바우라고 불려졌다고 한다.기타로 늦재, 안골, 암탁골, 소롱골, 대밭골 등이 있다.* 평두매마을▶ 마을의 유래평두매마을은 무등산 골짜기에 평평하고 넓은 들이 있어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평두매라 했다 한다. 이 마을ㅇ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연일 정씨로 약 200년 전에 이곳으로 오게 된 연유는 이곳에 탐진 최씨의 선산이 있는데 정씨에게 이 선산을 관리하게 해서 그 이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대곡면 평두매는 화암리가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다.-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바뀌면서 광산군 석곡면 화암리가 되었다.- 1957년 12월 2일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운영할때 석곡출장소 관할 청옥동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청옥동은 동구 관할이 되었다.-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청옥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되었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이 되었다.-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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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령동
    ● 동명의 유래 효령동(孝嶺洞)은 본래 광주군 우치면의 지역으로서, 효재 또는 효령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소재 또는 우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리, 학동리, 승평리, 우곡리와 봉황동과 종방리, 수곡리, 서작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효령리라 하였다.‘孝嶺洞’은 ‘孝嶺’이라는 고개와 관련되어 효자ㆍ효녀의 전설이나 설화가 있음직하다. 그러나 이 지명은 ‘소재’와 관련이 있다. ‘소재’는 한자로 표기하면 ‘牛峙’가 된다. ‘牛’는 훈이 ‘소’다. 방언에서는 ‘효자’를 구개음화현상에 따라 ‘소자’라 한다. 이와 같이 ‘소재’는 ‘효재’로 불리게 되고 ‘재’는 ‘嶺’(재령)자를 취하여 ‘孝嶺’으로 표기하여 생긴 지명이다.우리나라의 지명은 한자로 먼저 불린 것이 아니라 우리말 지명으로 먼저 불렸다가 이후 한자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牛峙’보다는 ‘소재’가 먼저 불린 것이고 이 지명의 원형이다. ‘소’는 牛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소고기’를 ‘쇠고기’라 말하는 것처럼 ‘쇠’와도 상통한다. 그러므로 ‘소’는 지명에서 ‘쇠’를 뜻하는 ‘金’과 상통한다. 때문에 ‘소’는 ‘素ㆍ牛’자로도 차자되고 또 ‘金ㆍ錦ㆍ衾ㆍ琴ㆍ今’등의 한자와 같은 계열을 이룬다.이곳 孝嶺洞에서는 ‘牛峙’와 봉학산 밑에 있는 이곳에서 으뜸 되는 마을인 ‘鶴洞’이란 마을이 있고, ‘굴보’라는 곳이 있다. 鶴洞의 ‘鶴’은 훈이 ‘새’이다. ‘새’는 ‘사이’의 축약이므로 鶴洞인 ‘샛골’은 ‘사잇골’에서 나온 지명이다. 그런데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을 ‘사이골’이라 하므로 이곳은 ‘샛곳’이라 할 것을 ‘쇠골’이라 할 것을 이곳이 고개이므로 ‘새재’라 부르게 되자 ‘牛峙’라 부르다가 ‘孝嶺’이 된 것이다.* 신촌(新村)마을▶ 마을의 유래 종방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로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신촌이라고 하였으며 1520년 무렵 행주 기씨인 덕성군 기진공이 옮겨와 살게 되면서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후 대부분 행주 기씨가 살았던 자작일촌 마을이었으나 최근에는 여러 성씨가 유입되어 30여가구가 산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호구총서에 신촌마을 나타남.- 1914년 4월 1일 우치면의 신촌, 학동, 우곡, 종방 각 일부가 효령리가 되어 광주군 우치면의 관할이 됨.- 1932년 11월 1일 광주군 우치면과 본촌면이 병합돼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 동제 실시에 의하여 우치동의 관할이 됨.- 1957년 12월 1일 지산출장소 관할 우치동이 121개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우치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우산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을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내려 오는 지명- 당꼬샘-도치골 배미 : 논의 모양이 도끼모양처럼 생겨서 붙혀진 이름.- 우시암골 : 논옆에 샘이 있었던 곳- 안산 : 마을앞에 있는 산- 한밭쟁이* 우곡(牛谷)마을▶ 마을의 유래 마을이 형성된 정확한 시기는 모르나 지금도 마을의 앞, 뒤의 밭에서 기와의 와편이 나오는 걸로 마을의 역사가 깊고 과거에는 마을이 꽤 컸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소가 살던 골짜기라 하여 우곡이라 했다 한다. 이 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성씨는 주씨와 방씨이고 그 후 김해 김씨가 들어온 후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사는 산성촌이 되었다. 마을 성립초에는 주씨와 방씨가 터를 잡았다 하여 마을을 주방죽이라고 불렀다 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우치면의 신촌, 학동, 우곡, 종방 각 일부가 효령리가 되어 광주군 우치면의 관할이 됨.- 1932년 11월 1일 광주군 우치면과 본촌면이 병합돼 지산면이 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을 광산군으로 개칭,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광주시에 편입, 동제 실시에 의하여 우치동의 관할이 됨.- 1957년 12월 1일 지산출장소 관할 우치동이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우치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을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쇠솥골 : 소의 먹이를 끊이는 솥모양과 닮은 골짜기를 쇠솥골이라 불렀다.- 뒤고라실 : 동네 뒤편으로 물이 흐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뙤집 : 흙으로 담을 짓고 대나무로 만든 집을 뙤집이라 불렀다 한다.- 모짐뜸 : 마을 앞 동산을 모집뜸이라 불렸다 한다.- 동호 배미 : 둥글고 넓적한 논을 동호배미라 불렸다 한다.- 바탕 : 메마른 땅을 바탕이라 불렀다 한다. 기타 당산미, 정자골, 동서골, 안공, 우골, 안산, 닥식봉, 방죽배미, 쌍새암* 하신(下新)마을▶ 마을의 유래하신마을은 경지정리가 잘된 넒은 들에 입지하고 있으며 마을 뒤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어 농사짓기에는 적합한 마을이다. 과거 벼농사가 성행하여 지금에 이르며 지대가 낮아서 하우스 농사에는 부적합하다 한다. 그리고 저지대로 홍수피해가 많다 한다. 또한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 될 만큼 인심이 좋다 한다. 현재 이 마을은 21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광산 김씨가 주로 많이 살고 있다 교통편은 16번과 26번이 운행하고 있으며,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마을로 10여분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마을의 역혁- 1914년 4월 1일 우치면의 신촌, 학동, 우곡, 종방 각 일부가 효령리가 되어 광주군 우치면의 관할이 됨.- 1932년 11월 1일 광주군 우치면과 본촌면이 병합돼 지산면이 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을 광산군으로 개칭,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광주시에 편입, 동제 실시에 의하여 우치동의 관할이 됨.- 1957년 12월 1일 지산출장소 관할 우치동이 121개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우치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을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이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쇠솥골 : 소의 먹이를 끊이는 솥모양과 닮은 골짜기를 쇠솥골이라 불렀다.- 뒤고라실 : 동네 뒤편으로 물이 흐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뙤집 : 흙으로 담을 짓고 대나무로 만든 집을 뙤집이라 불렀다 한다.- 모짐뜸 : 마을 앞 동산을 모집뜸이라 불렸다하다.- 동호 배미 : 둥글고 넓적한 논을 동호배미라 불렸다 한다.- 바탕 : 메마른 땅을 바탕이라 불렸다 한다. 기타 당산미, 정자골, 동서골, 안공, 우골, 안산, 닥실봉, 방죽배미, 쌍새암* 학동(鶴洞)마을▶ 마을의 유래약 400년 전 전주 이씨 이 근씨가 24살 때 임진왜란이 얼어나 장성 오산사에서 의병으로 있다가 왜적들을 피해서 이 곳을 숨어 들어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학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 앞산이 학이 비상하는 모양을 닮아서 학봉이라 하는데 연유하여 학동이라 했다 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행정구역 폐합이 이루어짐에 따라 우치면의 학동마을이 속한 효령리가 광산군 우치면의 관할이 됨- 1932년 11월 1일 광주군 우치면과 본촌면이 병합 돼 지산면이 됨.- 1935년 10월 1일 광주읍이 광주시에 편입됨에 따라 광주군을 광산군으로 개칭,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산군 지산면이 광주시에 편입됨에 따라 광주시 효령동이 됨- 1957년 12월 1일 지산출장소 관할 우치동이 121개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우치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우치동, 본촌동, 삼소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이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황새봉 :  점불 남쪽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황새처럼 생겼다 하여 황새봉이라 불렀다 한다.- 정자골 : 논 옆쪽에 정자가 있었던 곳을 정자골이라 불렀다 하낟.- 석쇠골 : 소의 구유모양을 하고 있는 골짜기를 쇠설골이라 불렀다 한다.- 서당골 : 과거 서당의 터가 있었던 골짜기를 서당골이라 불렀다 한다.- 논소골 : 과거 소가 한가하게 놀았던 골을 논소골이라 했다 한다.- 감남골 : 학동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감나무가 많아서 감남골이라 불렀다 한다.- 대남골 : 황새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대나무가 많아서 대남골이라 불렀다 한다.- 봉학산 : 학동 남쪽에 있는 산을 봉학산이라 불렀다 한다. 기타 점불, 맷골, 효령제, 구시공, 소재동, 시가끔 등으로 불리던 지명들이 있다.* 종방(宗坊)마을▶ 마을의 유래마을 앞에는 방죽이 있었는데 이 방죽 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흔히 방죽안이라고 했으며 상하촌 마을로 나누어 있는데 상촌을 지매촌마을, 하촌을 방죽안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이 상하촌 마을을 합해서 종방마을이라고 부른다. 우치동을 소재라고 부르는데 흔히 소재하면 종방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소재의 중심지가 종방마을이다. 이 마을은 약 500여년 전에 기 진씨의 슬하에 현, 권, 괄, 진, 준이라는 5형제가 있었는데 기 진의 넷째 아들 기 진씨가 지금의 일곡동인 광주의 새말이라고 불리던 곳에 터를 잡아 살았으며 이 후 그의 후손인 기회경씨의 11대조인 기 전씨가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종방마을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 그의 후손들인 행주 기씨가 대부분 살고 있는 자작일촌 마을이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효령리가 되어 본촌면 관할이 됨.- 1932년 11월 1일 우치면과 지산면이 병합되어 지산면, 생룡, 용강, 효령, 수곡, 태령등이 용전리가 됨.-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산군 지산면 16개 리가 광주시로 편입될 때 광주시 생룡, 용전, 용강, 효령, 태령동이 됨.- 1957년 12월 1일 지산출장소 관할 우치동이 121개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우치동은 서구 관할이 됨.- 1680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학시 북구 우치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을 설치하여 현재에 이름.▶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방죽안 : 종방마을을 말하며 방죽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 머개산 : 술병의 마개처럼 생겼다는 산- 금반등 : 산의 모양이 차려진 반상모양을 하고 있다는 산- 와우등 : 소등의 모양을 닮은 언덕으로 마을 뒤쪽에 있는 언덕- 정자골 : 정자가 있었던 곳- 산정밭 : 정자가 있었던 밭- 통 배미 : 여러개의 논을 합하여 부르던 이름. 마을 앞의 논- 요강 배미 : 요강 모양의 논- 장구 배미 : 장구 모양의 논- 방죽 배미 : 방죽 모양의 논- 도치 배미 : 도치 모양의 논- 쇠앗 배미 : 세모 모양의 논.지매촌, 대포리봉, 이상산 등이 있었음.-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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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출동(해산마을, 금당마을)
    * 해산마을▶ 마을의 유래해산마을은 광주, 장성, 담양의 접경지대에 있으며 마을 뒤로는 작은 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은 영산강 상류지역으로 넓은 평야지역이다. 마을의 지형이 마치 바다에 사는 게의 형태를 닮았다고 해서 해산(蟹山)이라고 불려졌다가 점차 와전되어 해산(海山)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김해 김씨로 약 300년전에 김종원(金鍾元)의 10대조인 김수귀(金壽龜)씨가 화순에서 건너와 이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 후 서산 정씨가 들어와 살았으며 현재는 양천 하씨, 김해 김씨, 서산 정씨등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마을의 위세가 강해서 가마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도 가마에서 내려서 지나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마을의 위세로 6ㆍ25동란이나 여러 역사적인 사건에도 별다른 피해가 없이 지낸 평안한 마을이었다. 다음으로 금당마을은 월출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써 첨단지구에서 용전으로 가는 도로변 왼쪽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장성과는 접경지대에 있다. 마을의 터가 금방석 같이 좋다는 뜻으로 ‘금당’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 금이 나올 거라고 한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파평 윤씨로 350여년 전에 尹相童씨의 9대조인 尹議가 충청도에서 난을 피해 처가인 서산 정씨를 따라 오다가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자작일촌 하다가 근래에 타 성씨들의 유입으로 산성촌이 되었다. 이 마을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효자가 많이 나오며 특히 마을 인심이 지금까지도 아주 좋다고 하는데, 이런 이유도 마을의 이름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삼소지면의 해산리가 본촌면 관할의 월출리의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월출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동을 51개의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 출장소 삼소동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 삼소동이 북구 관할로 편입.-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삼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진 배미 : 장대처럼 논이 길어서 진 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섬 배미: 논 가운데에 섬이 있어서 섬 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홈 뱀미 : 홈대로 연결된 수로를 이용하여 논에 물을 대서 농사를 지어서 홈 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둥근 배미 : 논의 모양이 둥글어서 둥근 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미주 배미 : 논을 미주와 바꿔서 미주 배미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응산봉 : 산의 봉우리가 마치 매가 산 위에 앉아서 이리 저리 둘러보고 있는 모양을 닮아서 응산봉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매부랑제 : 산의 봉우리의 모양이 매가 산 위에서 주둥이를 이리 저리 돌리며 무엇을 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어서 매부랑제 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바우벽 : 마을 뒤편에 많은 바위가 마치 벽처럼 둘려져 있어서 바우벽 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금당(金塘)마을▶ 마을의 유래 월충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써 첨단지구에서 용전으로 가는 도로변 왼쪽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장성과는 접경지대에 있다. 마을 앞쪽으로는 영산강지류가 흐르고 있으며 마을의 지대가 높은 산등성이에 계단식으로 위치해 있어 마을의 형태가 마치 소쿠리의 모습처럼 되어있다. 최초로 마을의 터를 잡은 성씨는 파평 윤씨이며 이후 김해 김씨, 달성 성씨 등이 살아오다가 최근에는 여러 성씨들이 함께 살고 있는 산성촌으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토마토 등 약간의 하우스 작물도 하고 있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 기록에 지금 이 지역으로 보이는 금당산, 고내마을 이름이 나타남-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 때 삼소지역의 금당, 궁암, 해산, 상대, 용정, 고내리가 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월출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삼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서구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지야, 석곡 출장소를 없애고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삼소동으로 편입-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하여 건국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뽕나무 배미 : 뽕나무가 많이 있었던 논. 지금이 후동굴 앞에 있음- 궁중바위 : 궁중에 바위가 떴다고 하여 불려진 바위 이름- 응천보 : 보를 내려고 궁리하던 어느 날 아침에 때아닌 서리가 내려 그 자국을 따라 봇도랑을 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조리터 : 조리모양의 터가 있는데 이곳을 조리터라고 한다- 후동굴 : 금당마을 뒷편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후동굴이라고 한다. 지금은 4~5 가구 정도만 남아 있으며 예전에는 주로 전주 이씨들이 살았으나 도둑이 자주 들어 거주하던 양반들이 떠나 버렸다고 한다.- 강변들 : 금당동쪽에 있으며, 예전에는 강가지역 이었다고 한다.- 낚시바위 : 지금의 경로당 옆의 바위로 예전에 그 바위 옆으로 강줄기가 흘렀는데 이 바위 위에 앉아 낚시를 즐겼던 곳이라고 한다.- 대장굴 : 재(금당에서 장성군 진원면 학림리로 가는 고개)- 뒷전굴 : 금당마을 북쪽에 있는 들로써 둔전이 있어서 불리어진 이름- 반학이 : 마을 서쪽에 있는 들- 때집 : 마을 동쪽에 있었으며 때집이 잇었던 마을-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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