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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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각동
    ● 동명의 유래 삼각동(三角洞)은 본래 광주군 오치면의 지역으로서, 삼각산(광주-) 밑이 되므로 삼각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산리, 외촌리, 가작리를 병합하여 삼각리라 불린 마을이다. 三角洞에 있는 산이름이 삼각산(三角山)이라 하더라도 산은 대체로 위로 솟아 있으므로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평평하여 삼각형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삼각산이라 불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산의 모습이 다른 산보다도 위로 많이 뾰족할 경우 이를 일명 송곳산으로 불리게 된다.그러나 이 마을의 고유한 이름이 ‘가작, 가자기’라 부르는 것을 보면 ‘가재기’가 ‘가지(衼)’로부터 불리는 이름이라 추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용비어천가에도 ‘가지(衼)’를 뜻하는 말을 ‘가재’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지(衼)’를 뜻하는 지명은 또한 ‘가작’으로 불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명에는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을 물줄기가 분기되는 곳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이런 곳을 물줄기의 모습이 나뭇가지처럼 생겼다하여 가지내, 또는 衼川으로 부르기도 하고 이런 삼각형으로 나뉘인 곳에 있는 산을 삼각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이곳 삼각산 아래에 있는 삼각동은 삼각산으로부터 유래된 지명이라 생각되며 삼각산아래에 있는 삼각동은 아마도 이런 물줄기가 분기되는 특징에 의해서 명명된 지명이라 추정된다.* 월산마을▶ 마을의 유래월산마을은 삼각 북동쪽 골짜기에 있느 마을로 월산각 밑으로 사기점이 있어 점촌(店村)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水原白氏이다. 수원 백씨 18세손 개민(愷民)이라는 분이 역적으로 몰려 피신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이 지역은 광주(光州)군 와지(蛙只)면에 속했다. 당시 이곳에 삼각외촌(三角外村), 가작촌(加作村), 어매(於梅), 중외(中外), 하백(河白)동마을이 있어옴.- 1914. 4.1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산, 삼각, 가작리는 삼각리가 되어 광주군 서방면에 속함.- 1955, 7.1 광주시 풍향출장소 관할 매곡, 오치, 삼각동이 됨. 광주시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서방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풍향출장소를 설치함.- 1957. 12. 2 122개 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매곡, 오치, 삼각동은 서산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73. 7. 1 구제 실시에 따라 서산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 4.1 동구 관할의 서산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 11. 1 광주직할시 북구 서산동이 되어 오늘에 이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어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나옴.- 1994. 7.1 서산동과 오치동으로 분동.- 1997. 3.1 서산동과 매곡동으로 분동▶ 마을의 지명 유래- 장등고개(재) : 월산에서 장운동의 장등으로 가는 고개- 철퇴골 : 월산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순산골 : 월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기타 가장골, 새터, 안골, 두빗당굴, 여시방골, 앞당굴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원삼각마을▶ 마을의 유래원삼각마을은 본래 광산군 오치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뒤에 삼각산(시 산천) 밑이 되므로 삼각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산리, 외촌리, 가작리를 병합하여 삼각리라 했다. 삼각동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이 元三角마을이라 한다. 또한 이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예전에 뿔이 3개 달린 소가 있었다고 하여 '三角'이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는 소의 뿔이 삼각형이라 하여 '삼각'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평택 임씨와 경주 김씨가 약 300여년 전부터 이곳 산세를 보고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이 지역은 광주(光州)군 와지(蛙只)면에 속했다. 당시 이곳에 삼각이촌(三角外村), 가작촌(加作村), 어매(於梅), 중외(中外), 하백(荷白)동마을이 있었음.- 1914. 4.1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산, 삼각, 가작리는 삼각리가 되어 광주군 서방면에 속함.- 1955. 7. 1 광주시 풍향출장소 관할 매곡, 오치, 감각동이 됨. 광주시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서방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풍향출장소를 설치함.- 1957. 12. 2 122개 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매곡, 오치, 삼각동은 서산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73. 7. 1 구제 실시에 따라 서산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 4. 1 동구 관할의 서산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 11. 1 광주직할시 북구 서산동이 되어 오늘에 이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어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나옴.- 1994. 7. 1 서산동과 오치동으로 분동.- 1997. 3. 1 서산동과 매곡동으로 분동.▶ 마을의 지명- 절터골 : 삼각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삼각사가 있었다가 빈대가 들끓어 헐어 버렸음- 선바우 : 절터골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바위- 삼객이 : 삼각동 마을- 칙댁골 : 절텃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칡이 많았음.- 북새터 : 밤에 북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하여 북새터라 한다.- 청룡들 : 삼각의 청룡 (왼쪽산맥)이 되는 산밑에 있는 들* 가작마을▶ 마을의 유래가작마을은 가재기 또는 가자기라고도 불려진다. 이곳은 약 450년 전에 장성 황룡면에 터를 잡고 살던 밀양 박씨 12대손 상효(尙孝)라는 분이 이 마을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원래 이곳은 밀양 박씨가 오기 전 丁氏가 살았었다고 하는데 모두 마을을 떠나 그때부터 박씨들이 自作一村 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이 지역은 광주(光州)군 와지(蛙只)면에 속했다. 당시 이곳에 삼각외촌(三角外村), 가작촌(加作村), 어매(於梅), 중외(中外), 하백(荷白)동 마을이 있었음.- 1914. 4.1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산, 삼각, 가작리는 삼각리가 되어 광주군 서방면에 속함.- 1955. 7. 1 광주시 풍향출장소 관할 매곡, 오치, 삼각동이 됨. 광주시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서방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풍향출장소를 설치함.- 1957. 12. 2 122개 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매곡, 오치, 삼각동은 서산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73. 7. 1 구제 실시에 따라 서산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 4.1 동구 관할의 서산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 11. 1 광주직할시 북구 서산동이 되어 오늘에 이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어 전라남도 행정구역에서 떨어져 나옴.- 1994. 7. 1 서산동과 오치동으로 분동.- 1997. 3. 1 서산동과 매곡동으로 분동▶ 마을의 지명- 여물봉(산) : 전남여상고 서쪽에 있는 산- 당그래봉(산) : 가작 북쪽에 있는 산. 당그래 같이 생겼음- 번짓들(들) : 삼각 서쪽에 있는 평평한 들- 가재기(마을) : 삼각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 가작. 가자기-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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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소동
    ● 동명의 유래 大村洞은 이곳 주변에서는 ‘큰 마을’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불리게 된 ‘大村’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洞名이라 생각한다. 이곳 大村마을은 옛날에 三所旨面이 있었던 所在地였다. 때문에 이곳 주변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었다. ‘三所旨’는 ‘三+所+旨’로 분석되는데 ‘三’은 ‘셋’을 뜻하는 말이고 ‘所’는 음이 ‘소’이므로 지명에서 ‘牛’와 상통하는 지명어이다.위의 ‘三所旨’라는 마을의 ‘旨’는 본래 이곳에 城이 있었거나 또는 山嶺이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마루’라는 뜻을 가진 ‘旨’자가 지명에 차자되어 쓰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차 山嶺을 뜻하는 고개는 그 기능을 잃게 되자 점차 ‘마을(村)’을 뜻하는 말로 뜻이 변질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곳 五龍洞에는 ‘잿물’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이곳에 山嶺이 있었음이 더욱 증명되고 있다 생각한다.▶ 대촌(大村)마을의 유래과거 이조 때 지금의 마을 뒷편 동녕골이라는 골짜기에 도적무리들이 모여 살았다 한다. 이 도적떼들은 남의 재산을 약탈해서 큰 기와집을 짓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러던 중 300여년 전 이들 무리가 문화와 문자에 조금씩 눈떠가지 시작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고 지금의 대촌마을로 이동하여 터를 잡고, 처음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동녕골 터에서는 지금도 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와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성씨는 풍천 임씨로 구전되고 있을 뿐 그 시기와 연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 뒤로 김해 김씨, 금녕 김씨 등이 유입되었다.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일제 말까지 270여호에 달한 김해 김씨의 자작 일촌이었으나 지금은 타성씨들의 유입으로 점차 산성촌이 되어가고 있다.▶ 마을의 연혁- 삼소지면의 소재지로 조선후기 기록인 [호수총수(1789)]의 동면에 속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삼소지면의 상대 하대 저작리와 장성군 외동면 궁암리 일부를 합하여 본촌면 관할의 대촌리가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 출장소 삼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지산 출장소 삼소동은 서구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삼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 우치, 삼소동이 통합하여 건국동이 설치되어 오늘에 이름▶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 간밤 배미 : 삼소지 동남쪽에 있는 논이라서 간밤배미라 한다- 감모 배미 : 넙디기에 있는 논으로 그 모양이 갓의 꼭대기를 닮아 감보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꽃나무쟁이 시암 : 소금쟁이 시 암 위쪽에 있는 우물로 꽃나무쟁이 시암이라 한다.- 동녕골 : 삼소지 서쪽에 있는 들로 이곳에 마을이 형성해 있었던 골이다.- 미주 배미 : 질알배미 아래쪽에 있는 논으로 살림이 어려워 논과 메주를 바꿨다해서 불려졌다.- 배맷등 : 삼소지 북쪽에 있는 등성이를 배밋등이라 불려졌다.- 비락 배미 : 논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불려진 이름이다.- 상대 : 대촌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대라 불려졌다.- 중대 : 상대와 하대 사이에 있던 마을을 중대라 불려졌다.- 하대 : 대촌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을 하대라 불려졌다.- 장구 배미 : 질알배미 위쪽에 있는 논으로 장구처럼 가운데가 잘름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장들 : 마을 남쪽에 있는큰 들을 한 장들이라 한다.- 들박샘 : 두레박에 줄을 달아 물을 길러 먹었던 샘으로 상대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샘을 들박샘이라 불려졌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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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룡동
    ● 동명의 유래 生龍洞은 본래 광주군 우치면의 지역으로서 생룡이라 하였는데, 1914년 내동리, 지내리, 용전리, 서작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생룡리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이곳 生龍마을은 오치동에서 일곡동과 우치공원을 지나면 나오는 마을이다. 이 마을을 지나면 龍田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변은 영산강이 흐르는 곳으로 담양에서 흘러나오는 금성천과 창평 방향에서 흘러내리는 증암천이 합수되는 곳과 인접한 마을이다. 그리고 생룡제와 대야제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 마을을 지나 영산강으로 합류되고 있다.필자는 지명에 ‘날’계가 있음을 주장한바 있다. 왜 ‘날’계라 하였는가? ‘날’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날’은 ‘칼날’의 ‘날’에 해당하는 어사이다. ‘날’은 ‘칼’에 달려서 날카로운 ‘날’로 사물을 둘로 가르는 기능을 하는 기구이다. ‘칼’의 옛 표기는 ‘갈’이었기 때문이다. ‘날’은 이렇게 사물을 나누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을 나누어지는 곳으로 인식하여 ‘날’계 지명으로 이름을 지어 부른다 생각한다.또 필자는 지명에 ‘갈’계 지명의 무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 한국의 지명들이 대개 물줄기가 합류되고 갈라지는 곳을 특징으로 지명을 명명하고 있음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필자는 이를 한국지명 형성의 기반이라 말한다.위의 生龍洞은 이러한 한국지명이 생성되는 좋은 본보기에 해당하는 곳이다. 즉 물줄기가 이곳에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줄기가 바로 마을 앞에서 갈라지거나 합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옛날에는 두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에는 물의 양이 두 배로 많아지기 때문에 홍수가 내리면 그곳은 물바다가 되기 때문에 그런 곳에는 집을 살수가 없기 때문에 합류되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홍수로부터 안전한 곳에 마을을 이루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계의 힘으로 제방을 높게 쌓고 또 구불구불한 강을 바르게 함으로써 물이 더 쉽게 빠질 수 있도록 직강공사를 했기 때문에 홍수 걱정을 덜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은 물줄기가 합류되는 곳과 가까운 곳에 마을을 형성해도 큰 걱정이 없게 되었다. 위의 生龍洞의 ‘生’은 훈이 ‘낳다’이지만 ‘낳다’가 다른 명사와 함께 쓰이는 관형형이 될 때는 ‘날’로 발음하게 된다. 따라서 ‘칼날’의 ‘날’과 소리가 같기 때문에 ‘날’은 ‘生’자를 택하여 이름을 짓게 되었을 것이고 ‘龍’은 이 마을이 물줄기로 인하여 명명되는 이름이기 때문에 ‘물’이라는 의미에서 ‘龍’자를 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생룡(生龍)마을▶ 마을의 유래무등산 범딕고개(도두원 고개)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덕산에서 일곡으로 뻗어있는 줄기, 외악고개 벗골에서 쌍교(송광정)로 뻗어 있는 줄기, 그리고 이 마을 위에 있는 죽취봉으로 뻗어있는 줄기로 삼각산을 이루는데 마을 뒷산 죽취봉의 형태가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는 구불구불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생룡이라고 불려졌다 한다. 또한 비틀재, 배골, 시산골, 옥터골, 지아골로도 불려지고 있다. 이 마을은 삼국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구운기와 등의 흔적이 출토되고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그 후로 조선조 13대 임금인 인종 을사년에 나주에서 금성범씨가 처음에 지금의 용전마을(갯두배미)에 터를 잡았으나 큰 수해를 당해 지금의 생룡으로 이주하여 처음 터를 잡았다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 기록에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생룡동이 나타났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우치면의 내동, 지내, 생룡, 용전, 서작리 각 일부 지역이 생룡리가 되었다.-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되었다.-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룡동이 되었다.-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조개시암것 : 논의 물이 조개만큼 조금 밖에 없어서 조개 시암것이라 불려졌다 한다.- 방천너머 : 방천(도랑)너머에 논이 있어서 방천너머라 불려졌다 한다.- 여시맷등 : 해질 무렵 산등성이에 여시가 자주 나와서 여시맷등이라 불려졌다한다.- 기타 진굴, 미주굴, 모생이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내(地內)마을▶ 마을의 유래마을의 형상이 마치 지내처럼 생겼다하여 지내마을이라고 불려졌는데 예전에는 내동과 지내라는 마을로 이루어져 지내동으로 불려졌다 한다. 그러나 대하 저수지의 축조로 인해 내동이 없어지고 지내라고만 불려졌다한다. 처음 마을에 터를 잡은 성씨는 금성 범씨로 전 지산 면장을 지낸 범재풍씨가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한다. ▶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 기록에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생룡동이 나타났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우치면의 내동, 지내, 생룡, 용전, 서작리 각 일부 지역이 생룡리가 되었다.-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되었다.-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룡동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딤-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장구 배미 : 논의 모양이 마치 장구처럼 생겼다 하여 장구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동냥치 배미 : 논 주인이 이 논에서 나는 곡식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동냥치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기타 산적골, 안고랑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모산(某山)마을▶ 마을의 유래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모산으로 불려졌다 한다. 이 마을은 예전에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을 때 한 스님이 이 마을에 탁보를 하러 왔지만 마을 사람들이 보시는 하지 않고 조롱을 했다 한다. 그래서 이 스님이 마을 사람들에게 생룡 잔등이라는 산기슭을 자르면 부촌이 된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그곳을 잘랐다 한다. 그 후 마을이 폐허가 되어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한다. 그 근거로 그곳 근처에서 구운 기와 등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후로 55년 전에 생룡에서 범씨 성을 가진 분이 이주햇 마을이 생성되었다 한다. ▶ 마을이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모산이 우치면 생룡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룡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제비다리 : 산 모양이 마치 제비다리처럼 생겼다하여 제비다리라 불려졌다 한다- 무리등 : 죽취봉 기슭에 위치한 작은 봉우리가 무리등이라 불려졌다 한다.- 수봇논 : 다른 사람의 땅을 빌어서 농사를 지었다 하여 수봇논이라 불려졌다 한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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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곡동
    ● 동명의 유래 水谷洞은 본래 광주군 우치면의 지역으로서 이곳이 영산강의 물가가 되므로 수곡이라 하였다고 추정된다. 본래 옛 지명인 『삼국사기』에 기록된 縣名중에 “買忽一云水城”이라 하여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골짜기인 水谷을 소재로 한 지명이 있다.‘수곡’은 ‘水谷’ 이외에 ‘籔谷’, ‘秀谷’, ‘樹谷’, ‘首谷’, ‘壽谷’등이 있고 또 ‘水谷’은 ‘물골’이외에 ‘술골’<충남-청양군-대티면-주정리>, ‘수릿골’<경북-울진군-북면-덕천리>등이 있다. 이곳은 영산강 물줄기가 흐르는 곳으로 강물이 범람하게 되면 들이 모두 물바다가 되기 때문에 ‘물골’이라 불렀을 것이고 따라서 이곳에 제방을 쌓아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제방을 쌓게 되자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이곳의 이름을 ‘水谷’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수곡(水谷)마을의 유래풍수지리상으로 마을에 불 화(火)자가 있어서 물 수(水)자를 붙여야만 화재를 면할 수 있다고 하여 수곡이라 했다 한다. 또한 골짜기에 항상 물이 흘러서 수곡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전주 이씨와 광산 김씨로 약 430년 전에 들어왔다 한다. ▶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폐합에 따라 수곡이 광주군 우치면에 속함- 1932년 11월 1일 우치면과 본촌면이 병합됨에 따라 지산면 수곡리가 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 수곡동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섬배미 : 논이 마치 섬처럼 생겼다하여 섬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구롱골 : 논이 수렁처럼 빠진다고 하여 구롱골이라 불려졌다 한다. 기타 머개골짜기, 네거리, 광비기 뜰, 망골뜰, 가점뜰 등의 지명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하여 건국동이 됨-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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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룡동
    ● 동명의 유래  신룡동(新龍洞)은 본래 광주군 갑마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복룡리, 신평리, 신기리 일부와 삼소지면의 하대리 일부, 천곡면의 봉산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신평과 복룡의 이름을 따서 신룡리라 하였다. 그런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의 자료에는 新平마을은 臣龍으로 표기하고 있고, 일제 때 제작된 5만분의 1지도에도 臣龍으로 표기되고 있다.그러나 ‘臣平’의 ‘臣’은 ‘新’과 음이 같기에 日人들이 아무렇게 기록한 것이요, 그 실은 이곳의 중심 마을이 伏龍 마을이기 때문에 ‘伏龍’ 마을 부근에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新’자와 伏龍 마을의 龍자를 택하여 ‘新龍’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룡동(新龍洞)은 ‘新平’과 ‘伏龍’의 두 마을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떼어서 ‘新龍’이라 하였다는 설명보다는 伏龍 마을 주변에 새로운 마을이 생기자 新龍이라 불렀는데 이를 臣龍으로 표기하기도 했지만 결국 新平이 新龍일 것이며 伏龍과 新龍에서 한 글자씩 취했다는 설명은 결국 동일한 설명이라 생각한다.▶ 복룡(伏龍)마을의 유래마을 뒷산의 지형이 엎드려 있는 용과 같아서 복룡이라고 했으며 마을 형성시기는 약 3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을형성은 사육신이 역적으로 몰리던 시절, 사육신에 속해 있던 금녕 김씨 김문기씨와 그의 자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상도 김해에서 숨어살다가 이후 장성, 순창, 정읍 등에서 많이 흩어져 살았다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유학자인 김 효씨로서 나주에서 살다가 이웃마을인 거진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김 효는 탁금제를 지어 후세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한다. 이들은 금녕 김씨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원 김씨의 성으로 살아오다가 최근에 금녕 김씨의 성을 되찾았다 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기록인 호구총수(1789)의 동면항목에 지금의 이 마을로 보이는 복룡촌이 나타남-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갑마보면의 복룡리가 본촌면 관할의 신용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신용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뱃노리 : 옛날 바다였을 때 이곳에 배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을 뱃노리라 불렀다한다.- 솔무쟁이 : 복룡 서쪽에 있는 산으로 솔이 울창하였다 하여 솔무쟁이라 한다.- 솔무더기 : 마을 동산에 솔이 묻어졌다 하여 솔무더기라 불렀다 한다.- 대통구리 : 대통모양의 똘을 대통구리라 했다 한다.- 잉애등 : 복룡 서북쪽 냇가에 있는 등성이를 잉애등이라 불렀다 한다.- 안진 배기 : 복룡 서쪽에 있는 들을 안진배기라 불렀다 한다.- 시워리 : 복룡 서쪽에 있는 들을 시워리라 불렀다 한다.- 섬배미 : 복룡 앞에 있는 논으로 가운데에 섬처럼 돌무더기가 있었다 한다.- 소밭등 : 복룡 동쪽에 있는 등성이로 소밭등이라 불렀다 한다.- 독산머리 : 복룡 남쪽에 있는 들을 독산머리라 불렀다 한다.- 동산 : 복룡 위쪽에 있는 등성이를 동산이라 불렸다 한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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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안동
    ● 동명의 유래 신안동(新安洞) 본래 광주군 오치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청계리 일부와 서양면의 이동리 일부, 동각면의 유림리 일부와 기례방면의 신촌리, 누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안리라 해서 서방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하여 생긴 동이다.이곳 신안동은 기례방면의 신촌(新村)과 지금의 신안동의 중심 마을이었던 자미(저메, 재매)마을인 안촌이 합하여 된 지명이라 추정된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광주군 기례방면과 경양면에 속함-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기례방면 신촌리, 병항리 일부와 서양면 동리, 오치면 청계리가 합해져 서방면의 신안리가 됨- 1955년 7월 1일 광주시 풍향출장소 신안동이 됨▶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자미(자산, 저메, 재메) : 신안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들자미(들자메) : 미 남쪽, 들가에 있는 마을- 청계 : 자미 북쪽에 있는 마을- 멧저메 : 자미 북쪽, 산 밑에 있는 마을-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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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산동
    ● 동명의 유래 양산동(陽山洞)은 본래 광주군 석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지리, 내촌과 갑마보면의 신하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양산리라 해서 본촌(지산)면에 편입하였는데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긴 동이다.그러므로 陽山洞은 陽池(陽地)로부터 유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陽山洞의 陽地 마을은 본래 陽池마을이었는데 이곳이 따뜻한 陽地라는 좋은 의미를 붙여 陽地라는 한자를 취하여 표기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양지 마을은 陽地, 陽池 두가지 한자로 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陽山 지역에는 ‘안들메’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內村이라 불리는 곳이며 ‘안들매’는 內村과 들메(野山, 또는 坪山)이라 불리는 마을이 합하여 불린 지명이다. ‘들메’는 연제동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의 들메와 합하여 안들메라 불리게 된 지명이다. 陽池는 저수지로부터 유래한 지명이다. 이곳 陽山에는 陽山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를 일명 陽池라 하였다. 그러다가 저수지의 기능이 쇠퇴하면서 陽池보다는 陽地라는 의미로 바뀌면서 陽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양지(陽地)마을의 유래 이 마을 주변 지역에 음지와 양지지역이 있는데 이 마을이 위치한 지역이 양지 지역이어서 양지 마을이라고 했다고 한다. 음지 지역은 지금의 전매청이 위치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진주 정씨로 정충교(63세)씨의 13대조인 정 계도가 터를 잡았다고 한다.이후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면 진주 정씨가 번성하여 큰 권세를 지녔을 때 진주 정씨의 외가인 청암 이씨에게 큰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외가인 청암 이씨의 자손 중 암행어사가 나왔는데 이 암행어사를 통해서 진주 정씨에게 보복을 하였고 그 사건으로 진주 정씨가 쇠락했다고 한다. 이후 담양 이씨가 들어와 살았고 담양 이씨의 외가로 두었던 하동 정씨가 들어와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는 하동 정씨 20여 가구, 전씨 15가구, 진주 정씨 5가구 등과 여러 성이 어우러져 살고있는 산성촌이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기록인 호구 총서의 동면항목에 지금의 이 마을로 보이는 양지리가 나타남.-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석제면의 양지리가 본촌면 관할의 양산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양산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름.▶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조산 : 개구리모양의 지형(지금의 경로당 자리)- 사주 : 뱀의 모양을 닮은 지형(지금의 양지마을) 기타 약 배미, 둠벙 배미, 대산미테, 모가쟁이, 오동나무 밭, 정갱이, 진 배미, 장구 배미, 납딱 배미, 밖 꾸리, 안 꾸리, 사독골, 앙난골, 더마래, 큼골, 좁은골, 안골, 맞두골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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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제동
    ● 동명의 유래 연제동(蓮堤洞)은 이곳에 ‘연꽃’이 많이 핀 연못이 있으므로 一名 ‘蓮堤’ 또는 ‘蓮池메’라 불렀다 한다. 따라서 ‘蓮堤메’의 ‘蓮’은 훈이 ‘연꽃’을 뜻하는 글자이므로 빌어 쓴 어사이고 ‘堤’는 제방을 뜻하는 어사로 연못의 제방을 표기하기 위하여 빌어 쓴 한자이고 ‘메’는 ‘山’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표기된 어사이다.또 이곳을 ‘들메’라 불린다. 그것은 이곳이 황룡강가이기 때문에 이전에 홍수가 나면 황룡강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까지 범람하였을 것이지만 지금은 큰 제방을 쌓아서 홍수가 나더라도 아무 피해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강 주변이 지금은 모두 옥토가 개조되었기 때문에 넓은 들이라는 의미에서 ‘들메’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생각한다.* 신촌(新村)마을▶ 마을의 유래 본래 신촌마을 옆으로 연지매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하며 물고기의 배형국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한 스님이 이 마을에 시주를 받으러 왔으나 이 마을 사람들이 이 스님을 골탕을 먹이고 놀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스님이 화가나 물이 부족했던 이 마을 주민들에게 마을의 어느 곳의 땅을 파보면 물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주민들은 이 스님의 말을 믿고 스님이 일러준 자리에 샘을 팠으나 이 샘이 위치한 자리는 물고기 배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물고기 배자리를 잘랐다고 해서 이후 마을의 불행이 왔고 결국은 연지매마을이 없어지고 연지매의 옆에 위치했던 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연지매마을이라고 불리워 왔으나 이 지역이 1957년에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신촌마을이라고 개칭되었다고 한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광산 김씨로 구전될 뿐 그 시기와 연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후 입향한 성씨는 광산 이씨로 농사를 짓기 위해 일곡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한다. 근래까지 광산 이씨들이 자작일촌 하다가 타 성씨들의 유입으로 점차 산성촌이 되었다.▶ 마을의 연혁- 광주군 석제면에 속한 6개 마을 중 하나로 그 이전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1935년 10월 1일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연제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간댓물 배미 : 논이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곳 배미 : 논 끝이 뾰족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기타둠벙 : 둥벙이 기타모양이어서 불려졌다.- 수렁골 : 논이 질퍽해서 밭이 푹푹 빠진다 하여 수렁골이라 불려졌다.- 안골 : 양쪽의 산이 있어서 아주 음침한 산을 안골이라 하였다 한다.- 개금산 : 산을 파보니 개금이 나왔다 하여 개금산이라 하며 이곳은 지금의 현대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치알봉 : 치알 귀신이 나왔다는 산으로 지금의 호반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다.- 봇평 : 봇물을 대서 농사를 지었다는 논을 봇평이라 불렸다고 한다.- 생수당 : 논에 샘을 파서 샘물로 농사를지었다는 논을 생수당이라 한다.- 수렁 배미 : 높같이 발이 빠지는 논을 수렁배미라 한다. 기타 쇠정이, 수정배미, 독바위, 안산등 등이 있다.* 신평(新坪)마을▶ 마을의 유래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전주 이씨이다. 이기홍씨가 180년 전 전북고창에서 외가인 동배실(현 동운동)마을을 거쳐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전주 이씨, 유씨, 영광 정씨 등의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산성촌이다.▶ 마을의 연혁- 광주군 갑마보면에 속한 9개 마을 가운데 하나로 그 이전이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폐합 때 갑마보면 신평리가 본촌면 관할 신용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신룡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독선머리 : 신평 서쪽에 있는 들의 독선머리라 한다.- 방마치 배미 : 신평 앞에 있는 논을 방마치 배미라 불렀다 한다.- 선암봉 : 신평 동쪽에 있는 산으로 선암이 있다하여 선암봉이라 불렀다 한다.- 신선바위 : 신평 뒤에 있는 큰 바위를 신선바위라 불렀다 한다.- 천삿들 : 신평 북서쪽에 있는 들로 모래가 많아다 한다. 기타 안거 배미, 진 배미, 바깥 배미, 장구 배미, 높은덤, 통 배미, 대통 배미, 선울래, 뱃논, 바깥 배미 등이 있다.* 내촌(內村)마을▶ 마을의 연혁-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갑마보면 내촌리가 본촌면 관할 양산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연제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장구봉: 산봉우리가 장구모양처럼 생겼다하여 장구봉이라 불려졌다.- 군자봉 : 군자들만 산다는 산으로 현재 천구교인의 공동묘역이다.- 큰봉재 : 앞산 밑에 산이 크다고 해서 큰봉재라 불려졌다.- 주막거리 : 대도리 주막이 있던 자리에 위치한 논.- 쇠실골 : 공단이 들어간 골을 쇠실골이라 한다.- 한강샘 : 샘에 물이 잘 나온다고 하여 한강샘이라 불려졌다.- 안글메 : 과거 양산동의 들메 안쪽이 된 곳을 안들메라 한다.- 왕구싯재 : 내촌 동쪽에서 매곡동으로 가는 고개를 왕구싯재라 한다. 기타 관지치 등이 있다.* 외촌(外村)마을▶ 마을의 유래예전에 이 주변을 연제동이라 하여 들메라고 했는데 이곳이 들메의 바깥에 있어서 밭들메라고 하였으며 한자로 외촌으로 표기하여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게 된 계기는 이 마을 옆 동산 골자기에 뒷메골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는데 이 뒷메골에서 약 400여년 전에 동학란으로 큰 피해가 있어서 난을 피하여 터가 요새같이 감추어진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뒤메골에서는 아직도 마을의 흔적으로 보이는 기와 와편과 석기 등이 마을 주민들에 의해서 자주 발견되어지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마을의 연혁- 조선후기 기록인 호구총수에 지금의 외촌마을 보이는 외촌리가 나타남.-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석제면의 외촌리가 본촌면 관할의 연제리에 편입됨.-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연제동 관할이 됨.-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본촌동 관할이 됨.-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지산출장소 본촌동은 서구 관할이 됨.- 1980년 4월 1일 서구관할의 본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될 때 광주직할시 북구 본촌동이 됨.-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삼소동, 우치동이 건국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름.▶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쇠둑머리 : 쇠둑머리라는 바위가 있는 언덕으로 광주에서 제일가는 명당이라고 한다.- 밭들메 : 연제동의 바깥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장구봉 : 마을 동쪽에 있는 산으로 장구모양의 산봉우리를 장구봉이라고 한다.- 제봉산 : 산 형태가 웅장하여 불리워진 이름을 제봉산이라고 한다.- 백모래 배미 : 예전에 영산강물이 범람하여 이 지역까지 강물이 밀려와서 강변을 이루어 백사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백모래 배미라고 한다. 기타  밭바구리, 배미, 군자봉 등이 있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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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룡동
    ● 동명의 유래 五龍 마을은 호구총수에는 기록되지 않은 마을이지만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의『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의 자료에는 五龍마을이 표기되고 있다. 지명은 대개 그 지역의 지리적 특징을 반영하여 명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五龍마을은 지형이 龍처럼 생겼다하여 불리는 지명이라 한다. 이곳 五龍洞은 담양 추월산에서 흘러내리는 용천과 금성면에서 흘러내리는 금성천 그리고 옥과와 무정면에서 흘러내리는 오례천과 창평에서 흘러내리는 증암천이 합하여 영산강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곳으로 많은 물이 유입되기 때문에 물줄기가 구불구불하여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한다.본래 龍의 옛 말은 ‘미르’였다. 그런데 이 ‘미르’는 ‘물’에 그 어원이 있다. 때문에 물줄기가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곳에는 예로부터 ‘龍’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음을 볼 수 있으며 이곳 주변에도 龍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음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五龍’은 ‘五’의 음 ‘오’와 ‘龍’의 첫소리 ‘ㄹ’음을 취하여 ‘올’로 읽은 지명이라 생각한다. 예로부터 지명에는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에 合을 뜻하는 고대 국어인 ‘올’이 쓰였다. 때문에 이곳에도 물줄기가 합수되기 때문에 ‘올’을 ‘五龍’으로 표기하여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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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치동
    ● 동명의 유래 오치동(梧峙洞)은 본래 광주군 오치면의 지역으로서 머구재 밑이 되므로 또는 오치라 하였는데, 1914년 상촌리, 하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치리라 불렀다. 이렇게 梧峙洞은 ‘머구재’로부터 생긴 지명이다. ‘머구’는 무슨 뜻일까?『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梧峙洞은 머구나무(머귀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즉 ‘머귀나무’는 오동나무니 ‘머구’나 ‘머귀’의 뜻을 가진 한자인 ‘梧’(벽오동나무 오)자를 취하고 ‘재’나 ‘고개’를 뜻하는 ‘峙’자를 택하여 명명한 지명이란 뜻이다.그러나 호구총수 자료에는 ‘蛙只里’라 표기되고 있다. ‘蛙’자는 ‘개구리 와’자이다. ‘개구리’의 옛말은 ‘머구’이다. 때문에 ‘蛙只里’의 ‘只’는 차자표기법의 관습상 ‘머기’의 제2음절인 ‘기’음을 다시 한번 표기하여 ‘只’가 ‘머기’의 ‘기’임을 설명적으로 보여주는 표기인 것이다. 그러나 풍수지리를 믿는 주민들은 호구총수 자료의 ‘蛙只里’에 대하여 이곳의 지리적 특징이 ‘개구리 형국’이기 때문에 명명된 지명이라 말하기 쉽다.그러나 이 지명이 ‘개구리’와는 별 상관이 없는 지명이 아니라 생각한다. 혹 이곳에 지금은 오동나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오동나무를 ‘머구나무’라 불렀으므로 ‘머구나무’가 많은 고개라서 ‘梧峙’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오동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이야기는 성립될 수 있어도 ‘개구리가 많은 고개’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더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상촌, 하촌, 박야, 황계, 새터마을의 유래오치동은 원래 '머구재'라 하였는데 漢字로 고치면서 오치(梧峙)라 하였다. 이 고개에 머구나무(머귀나무)가 있어서 머구재라 한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오치는 상촌, 하촌으로 나뉘어 불려졌는데 상촌은 하동 정씨가 하촌은 함평 이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오치 1동에서 31사단에 접한 신기마을도 하동 정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박야마을은 박들이라는 고개(현, 삼일교회) 일대에 있던 마을이었는데 나병이 돌아 사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의 연혁- 1935. 10. 1 광산군 서방면 오치리가 됨.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돼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1955. 7. 1 광주시 풍향출장소 오치동이 됨. 광주시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서방면이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편입을 위해 풍향 출장소를 설치함.- 1957. 12. 2 122개 동을 51개 운영동으로 축소함에 따라 오치동은 서산동 관할 법정동이 됨.- 1961. 3. 10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1973. 7. 1 구제 실시에 따라 서산동은 동구 관할이 됨.- 1980. 4. 1 동구 관할의 서산동은 북구 관할이 됨.- 1994. 7. 1 서산동에서 오치동으로 분동.- 1997. 3. 1 오치동을 1동과 2동으로 분동.▶ 마을의 지명- 가루고개 [고개] : 매머리 동쪽에서 문화동으로 가는 고개- 가매봉 [산] : 매머리 동쪽에 있는 산- 강정메 [산] : 오치 동쪽에 있는 산- 거문곳등 [등] : 참삿골과 물망골 사이에 있는 등성이. 옥녀탄금형의 명당이 있는 곳- 굉이남갓 [들] : 떡깍새 동쪽에 있는 들- 노모실들 [들] : 참삿골 동북쪽에 있는 들."노모실"이란 마을이 있었음- 능안골 [골] : 역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 광산노씨 구능단이 있음- 당산메 [산] : 오치 동북쪽에 있는 산- 더우시암 [우물] : 오치 남쪽에 있는 샘- 더우시암들 [들] : 더우시암 근처에 있는 들- 딱깍새 [들] : 새방죽 동쪽에 있는 들- 도정고개 [고개] : 도정 정덕필이 과거에 급제하여 방을 걸었던 곳 = 방고개- 두매미들 [들] : 서당산 서쪽에 있는 들- 마녕굴 [들] : 오치 서남쪽에 있는 들- 매머리 [마을] : 오치 남쪽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 현재 용봉동과 경계로 대신파크 자리- 매머리들 [들] : 오치 서남쪽에 있는 들- 머구재 [마을] : 오치동- 머구재[고개] : 오치남쪽에 있는 고개. 머구나무(머귀나무)가 있었음- 물망골 [골] : 능안 동쪽에 있는 골짜기. 물맞이를 했다함- 박들 [마을] : 차독고개 북쪽에 있는 마을. 1. 땅이 메마름. 2. 박씨가 많이 살았다- 박야 [마을, 들] : 박들- 방고개 [고개]: 오치 동쪽에서 문화동으로 가는 고개. = 도정고개 도정 정득필이 과거에 급제하여 방을 걸었던 곳- 북생잇등 [등] : 오치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 북장굴 [들] : 방고개 아래편에 있는 들- 뻐드정이 시암 [샘] : 오치와 방고개 사이에 있는 샘 곁에 노거수인 버드나무가 있었음- 비선골 [들] : 홈건네 동쪽에 있는 들. 비(碑)가 섰었음- 삼부래기 [산] : 방(반)고개 동쪽에 있는 산- 상촌 [마을] : 오치 웃마을. = 상오치- 새방죽 [들] : 더우시암 남쪽에 있는 들. 근처에 새로 만든 방죽이 있었음- 새터 [마을] : 오치 북쪽에 새로 된 마을. = 신지, 신촌- 서당산 [산] : 복장골 남쪽에 있는 산. 높이 64m. 서당에서 관리함. 서당매(매머리 동북쪽). 현재 청소년 수련장과 경계- 소구래 [들] : 박들 서쪽에 있는 깊은 들- 신기(新基) [마을] : 새터, 신촌- 신삼는 바우 [바위] : 오치 뒤에 있는 너를 바위.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광주에서 이곳에 이르러 보니 신이 다 닳았으므로, 이 바위에 앉아 신을 다시 삼아 신고 담양(潭陽), 대치(大峙)로 갔다함- 아랫마을 [마을] : 오치 서쪽 아래에 있는 마을. 하오치, 下村- 안산 [산] : 매머리들 앞에 있는 산- 여시 바우 [바위] : 여시박굴에 있는 바위. 문흥동과 경계- 여시박굴 [골] : 서당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여시바우가 있음- 역굴 [골] : 절터골 아래 있는 골짜기. 큰 안골에 고을이 있을 때 이곳에 역(驛)이 있었다 함- 오치방죽 [못] : 오치 앞에 있는 방죽. 지금 하전이 들어섬. = 종소제(宗沼提)- 웃마울 [마을] : 오치 동쪽에 있는 마을. 상오치, 상촌(上村)- 종소제(宗沼提) [못] : 오치 방죽- 정터골 [골] : 역굴위에 있는 골짜기인데 송감사 단묘가 있음- 진구래(들) : 박들과 소구- 진삿등 [등] : 오치 뒤쪽에 있는 등성이. 진사(進士) 이씨(李氏)선조의 묘가 있음- 차독고개 [고개] : 오치 북쪽에 박들로 가는 고개. 차독(차돌)이 많음- 참삿골 [골] : 오치 북쪽에 있는 골짜기. 찬샘이 있음.- 큰안골 [골] : 물망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오치와 삼각동 사이에 있는 큰 골짜기인데 옛날 광주 고을이 있었다함. 옛 기와 조각들이 발견 되었음. 현재 31사단 군부대가 들어섬- 하촌 [마을] : 아랫마을 = 하오치- 홈 건네 [들] : 굉이남갓 동쪽에 있는 들. 홈(홈통)놓은 곳의 건너쪽이 됨- 황계머리(黃鷄-) [마을] : 오치 서쪽에 있는 마을- 무드리 향토사료집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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