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락포樂圃 정인식鄭仁植<현대인물>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6·25때 납북당한 “국회의원 락포樂圃 정인식鄭仁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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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식(1911~1951 납북) 대한민국의 제2대 국회

의원. 호는 락포樂圃. 본관은 하동. 정해붕鄭海鵬의

3남으로 광주 북구 양산동 양지 마을 출신이다.

경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산군 지산면장, 광산군

농민회장, 국민회 광산군지부 부위원장, 대한독립촉

성국민회에서 활동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광산을, 국민당)에 당선되어 6·25가 터

지기 직전인 1950년 6월19일 2대 국회가 개원하여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

작한 지 1주일 만에 전쟁을 맞이했다. 2대 국회는 6·25 남침 사실을 듣고

이튿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출석시켜 긴급 상황을 청취한 다음 6월

27일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을 불러 긴박한 전선 상황을 듣는다.

이때 두 국방의 주역은 “북한 괴뢰군이 남침을 감행했지만 용감한 국군

의 반격으로 퇴각중이며 우리 군대 사기는 드높아 38선은 물론 평양까지

도 마음만 먹으면 진격할 수 있다.”고 코미디 같은 답변을 했다.

이에 고무된 국회는 유엔과 미국에 메시지를 보내기로 하고 <수도 사수

결의안>을 채택한다.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한 국회가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의 말만 믿었는데, 이미 포천을 지나 동두천을 점령한 인민군의

대포 소리는 의정부를 육박하고 있을 때여서 수도 사수 결의는 우스갯거

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정부는 6월 28일 대전으로 이전한다. 이런 경우 최우선적으로

정부와 함께 떠나야 하는 기구가 국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단 한

마디 전화통보도 없이 자신들의 짐만 챙겨 도망갔고 6월 28일 한강다리를

폭파시키고 만다.

2대 국회의원 210명 중 148명은 눈치 빠르게 피난길에 올랐지만 62명은

넋을 놓은 채 서울에 남아있다가 세 의원은 피살되고, 그리고 27명의 국

회의원은 북한으로 납치되거나 행방불명으로 분류되는데 그 중 24명은

납북자로 확인되나 3명은 지금까지 행방을 모른다. 서울에서 체포되지 않

고 숨어 있다가 수복 후에 다시 복귀한 이는 32명인데 피난길에 원인불명

으로 사망한 사람도 5명이나 된다.

한국 전쟁 때 24명의 국회의원이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그의 행방

은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맡았다가 1958년 12

월 평북 의주 농목장으로 이주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북조선에서

는 정인식이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이미 사망하였고, 평양 룡성구역의

특설묘지에 묻혀 있다고 밝혔다.


출전 지산 향토지리지,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아오지의 한.


-자미(紫薇)골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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