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충신,의병>
무등산의 익호장군 충용군 조선 의병의 총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김덕령(1568. 선조 원년~1596. 선조 29)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공忠壯公. 본관은 광산. 아버지 김붕변金鵬變과 어머니 남평반씨의 3

남 3여 중의 둘째 아들로 광주 충효동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종조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7세에 향해鄕

解(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이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

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 참여하여 전주에 이르렀을 때 형이 너는 돌아

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권고에 따라 고향에 돌아와 무등산에서 무예

를 닦고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

서 지원활동을 하였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여, 어머니 상중에 있

는 김덕령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추천하고,

전라도순찰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의 조정에 천거가 있은 뒤, 12월

27일 분조인 전주 무과 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

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

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

 1594년 1월 22일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사람 최담령崔

聃齡을 별장으로 삼고,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함양, 산청을 거쳐 4월 초

진주 대곡면 대곡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혁

파하여 충용군에 통합함에 따라 조선의병의 총수가 된다. 이로써 의병장

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

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 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

했으나, 이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

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채비를 갖추

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

생겨 과음하고 군법을 엄하게 해 막료, 군졸 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5년 12월, 김덕령은 엄격한 군율 적용하여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

의 노복을 장살한 살인죄로 체포 구금되지만,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

鄭琢의 변호로 무고가 드러나 왕의 특명으로 이듬해 2월 말 석방된다.

1596년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

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

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 곽재우, 고언백高彦伯, 홍계남洪季

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 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

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1596년 8월 21일 형

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당시 장군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장군이 죽기 직전 옥중 생활의 심정을 한탄하면서 ‘춘산모퉁이’를 노래

했는데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이 시조는 억울한 누명을 내(연기) 없는 불에 비유해 산불은 끌 수 있으

나 자기의 몸속에 붙어 타오르고 있는 억울한 마음의 불은 끌 수 없음을

비유하여 한탄하는 의기가라 하겠다. 그는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

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숙종 4)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

에 봉사손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 되었다. 1785년(정조 9)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3년 뒤인 1788년(정조 12)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

되고 ‘정려와 충효리 표리비’를 하사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

이 있는 인물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 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1789년(정조 13) 또다시 종1품 관직인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1680년에

의열사義烈祠로 사액 되었다. 이 사우는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75년 2월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023(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 13)

에 충장사로 복원하여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

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구 역사인물, 조선왕조실록, 광주읍지, 충장공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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