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희수(1861~1934)는 대한제국기의 문신. 자는 문재聞載. 호는 하은荷
隱. 본관은 광산. 김영덕金永德의 아들로 광주 북구 매곡동 하백 마을 출
신이다.
현와 고광선高光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79년(고종 16) 식년문
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고, 1884년에는 다시 1879년(고종 16) 식
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고, 1884년에는 다시 한림소시翰林召
試에 선발되었다. 그 뒤 시강원겸사서侍講院兼司書, 시강원필선侍講院弼
善, 이조참의 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한 뒤, 갑오개혁 이후에는 탁지아문협
판度支衙門協辦이 되었고 광무 연간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과 궁내
부 특진관을 지냈다.
현재 연파정蓮坡亭은 그가 부친을 위해 1918년에 건립하였던 것인데
아들 용학이 그를 위해 하은정을 신축하던 때에 인부들의 잘못으로 불이
나서 1934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정자의 4면에 오동나무로 마루를 덧붙였
고 덧문을 달아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처마의 곡선이 중앙에서부
터 반전을 이루어 조로朝露와 후림後林이 매우 자연스럽다.
또한 ‘연파정’이라는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의 대서 현판이 걸려 있고
13개의 판각 주련이 각 기둥에 부착되어 있다.
정자 내부의 구조는 벽이 없는 마루로 터져 있고 상량을 기준으로 한중심
부분에 4개의 기둥이 있다. 이 기둥 위에 사각 다락이 설치되어 있
고, 이 다락의 아래에 벽이 없는 조그만 별실이 있다. 이 별실의 위아래로
개폐하는 칸막이 덧문이 걸려 있고 사면의 벽상에는 당시 유림들의 시문
원고를 표구한 네 개의 대형 현판과 세 개의 판각 시문이 부착돼 있다.
정자의 정면에는 이층형 와가로 된 정려각 형태의 조그마한 단칸 출입
문이 담장 사이에 설치되어 있고 이 출입문의 밖에 정원 형식의 두렷한 동
산이 자리해 있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며 스승인 고광선의 봉산정사鳳山精舍를
짓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1924년 노사 기정진의 고산서원 담대헌澹對軒
중건할 때 2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또 1925년 목활자로 간행된 전라도
광주읍지光州邑誌를 광주향교에서 발행하였는데 그가 저작 겸 발행자로
되어 있고, 기동설奇東卨과 박봉주朴鳳柱가 서문을 쓰고 고유상高維相
이 발문을 썼다. 하은정은 그의 아들 김용학에의해 1933년에
신축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
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