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문과,무과>
13개 고을의 원님으로 선정을 베푼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김윤제(1501~1572)는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공노恭老. 호는 사촌沙村.

본관은 광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 마을(당시, 석저촌)

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조부이다. 1501년 후珝와 여산김씨 사이

둘째 아들로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수학하였는데 명민明敏하여 일반인과 다른 자품

이 있었으며 문예文藝를 일찍 성취하였다. 1528년 진사에 합격하였고,

1531년 문과(병과 23위)에 급제한 뒤 직강直講,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

와 전중어사겸춘추관편수관殿中御使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고, 지방

수령으로 나아가 고창현감(高敞縣監 1539~1540), 부안군수(扶安郡守

1548~1552), 전주진관全州鎭管,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나주목사(羅州

牧使 1555~1560) 등 13개 고을의 원님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

았다.

 특히 나주목사로 재직 당시 서적을 간행하여 유학 보급에 힘썼다. 1557

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주자대전朱子大全』의 글을 뽑아서 『주

자문록朱子文錄』 4책을 엮었는데 그가 간행하여 호남과 영남 지역의

향촌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발문은 그의 아우의 사위인 송정황宋

庭篁이 썼다.

그는 나주목사로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 노년을 보내며 환벽당

을 구축하고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충장공 김덕령, 같은 이들을 가르

치니 하서 김인후가 아름답게 선을 좋아하는 도량이 있다고 일컬었다. 한

편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보를 만들어 농수로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매제

인 소쇄공 양산보의 소쇄원 조영에도 이바지하였으며 낙남한 선비들의 시

회의 공간으로 환벽당을 활용하였다.

환벽당은 비스듬한 비탈에 자연석 축대를 쌓고 지은 동향 건물이다. 정

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남쪽 2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북쪽 2칸이 방이

며 그 앞에 반 칸짜리 툇마루가 깔려 있다. 원래는 정각 형태였는데 후대

에 중건할 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루에서는 남쪽의 무등산

과 창계천이 내려다보인다. 원래 푸른 대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환벽당이

라고 했다는데, 지금은 대숲은 없고 집 뒤 비탈과 앞쪽 축대 아래의 커다

란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밖에도 환벽당 뒤에는 왕벚나무가 있고

옆에는 모과나무가 있으며 또 축대 아래에 느티나무와 벽오동 나무들이

있다.

 그는 16세기 호남사림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식영정息影亭,

소쇄원瀟灑園과 함께 성산시단星山詩壇의 한 부분인 환벽당環碧堂을 중

심으로 시단을 이루어 당대 명류 시인들과 수창하였다. 그가 교유한 대표

적 인물들을 살펴보면, 송순宋純, 임억령林億齡, 김인후金麟厚, 소세량

蘇世讓, 양산보梁山甫 부자, 기대승奇大升, 양응정梁應鼎, 김성원金成

遠, 정철鄭澈, 고경명高敬命, 백광훈白光勳 등 호남시단湖南詩壇의 대표

적 시인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에 의해 환벽당을 주제로 한 제영과 풍경을 배경으로 한 시

가 많이 남아있다. 문학 공간 환벽당에서 탄생한 시들은 시어의 이미지가

맑고 그 소리가 유려하여 가락이 붙어 있어 맑고 담박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들은 당시 호남시단의 시적 특성이 보인다. 환벽당 시인들은 호

남시단의 중심인물들이었고 당시풍을 추구하던 시인들이었다. 그들의 시

는 기본적으로 흥감을 중시한다. 환벽당에서 제작된 시들은 대상과 합일

을 추구하거나, 시인 자신을 공간 속에 대상화 객관화하여 암시적으로 표

현되어 있어 대체로 시적 대상과 시인의 감정이 융합된 함축성이 강한 시

들이 많다.



출전 문과방목, 광주읍지, 광산김씨 충장공파보,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