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충효당忠孝堂 김치광金致光<문과,무과>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신 “충효당忠孝堂 김치광金致光”



 김치광(1732~1800)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국빈國賓. 호는 충효당忠

孝堂. 본관은 광산. 김덕령 의병장의 후예로 아버지 도명道鳴과 서산류씨

의 둘째 아들로 광주 북구 충효동 충효 마을 출신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직하고 진실하며 학문에 근면하여 일찍이 문장에 통달

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1777년(정조 1) 46세 늦은 나이에 증광시 병과 23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초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783년(정조 7) 10월 12일 목능별검穆陵別檢을 거처 1786년(정조 10) 1

월 25일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있을 때 정조가 “충장공의 후손이니 내

직에 빈자리가 나면 후보자로 추천하여 조정에서 거두어 등용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하였다.

1786년(정조 10) 5월 11일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빈궁도감낭청殯宮都

監郎廳에 제수除授되어, 5월 12일 빈궁도감의 분장별단分掌別單의 책임

을 맡았다. 5월 14일 본 도감의 칭호를 오늘부터 혼궁魂宮으로 고치고 일

체의 여러 가지 일을 전례에 따라 마련하도록 하고, 그리고 혼궁의 낭청은

전부터 2~3인으로 운영하였으니, 그는 그 직을 면하게 되었다. 그런데 6월

23일 그는 다시 능청의 봉애책관捧哀冊官으로 제수되고, 그 다음 날 그는

최복衰服을 입었다.

 1786년(정조 10) 윤칠월 20일 그는 삼례찰방參禮察訪으로 빈궁도감 낭

청의 공로로 상현궁上弦弓 1장을 사급 받았다.

1787년(정조 11) 4월 2일 전라감사의 근무 평가 보고에 “삼례찰방 그는

귀하게 여길 점은 순순하고 성실한 것이고, 잘못한 점은 일에 서툴고 사리

에 어두운 것입니다. 우속郵屬을 진휼한 것도 비방이 없습니다.” 하였고,

1787년(정조 11) 6월 15일 삼례찰방은 마정馬政에 더욱 힘써야 한다.

1789년(정조 13) 2월 23일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이 되었다. 뒤에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갔다.

1792년(정조 16) 1월 28일 그는(전 정언) 어미에게 봉작封爵해 달라는

일이었는데, 전교하기를 “살펴서 즉시 초기하여 내게 물어 처리하라.” 하

였다.

1792년(정조 16) 2월 26일 전라도의 유학 유격 등의 상언에 ‘제 스승 김

술현金述賢의 문도 가운데 전 정언 김치광 외 4인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

고, 사마시에 6인이 한 문도에서 한꺼번에 나왔다. 법전에 비추어 보면 5인

이 등과해도 가자 하기에 충분하거늘 하물며 대과와 소에 10여 인이나 등

과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조사한 후에야 결정할 일이겠는가, 이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도리어 번잡할 뿐이니 추고하고 상언에서 바란 대로 시행

하라.”하였다.

1792년(정조 16) 윤사월 21일 예조좌랑禮曹佐郎으로 임명되고, 1792년

(정조 16) 6월 22일 은율현감殷栗縣監이 되었다. 12월 15일 황해감사 보

고에 은율현감은 “잘 다스리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나 병 때문에 혹 직무

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모두 중입니다.”

 1793년(정조 17) 6월 15일 은율 현감은 “병들었다고 어찌 일에 방해가

되겠는가, 군교들의 포악함을 제압해야 한다.” 보고하니 은율 현감을 파직

하지 말고 황해도의 도신을 신칙하여 스스로를 면려하여 다른 사람을 면

려하도록 하였다.

1793년(정조 17) 8월 22일 ‘은율 현감이 5월에 어버이의 병 때문에 말미

를 받아 광주光州에 내려갔는데 여러 번 재촉해도 끝내 임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조에서 해당 도에 관문을 보내 즉시 돌아오게 해 주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1798년(정조 22) 6월 21일 그를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임명하였다.




출전 북구 역사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과방목, 정조실록, 광주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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