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동수(金東洙) : 1879~?

김동수(1879~?) 는 본관은 김해로 광주목 경향면 병문동, 현 북구 우산동 283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처가댁인 중흥동 84-3번지에서 살기도 했다.

(후손 김홍두 증언)  포목상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한말의 망국과정을 지켜보면서 의분을 품고 살다가 결국 의병을 주도한 전남의병이 도처에서 봉기하자 1908년 7월 광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 의병대에 가담하여 활약 하였다. 김동수 의병장은 뒤에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광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일제 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하였다. 그의 의병대는 65명의 의병으로 편성되었고,

 부관은 이기섭(서방면 모른거리 출신), 선전병은 선덕현(서방면 신나굴 출신), 도포사는 임윤팔. 임윤오(오치면 외촌 출신) 형제, 도십장 김재민(천곡면 봉산리 출신) 이었고, 의원은 양동골(서방면 솔대거리 출신), 백학선(모른거리 출신), 그리고 박포대(신나굴 출신)이었다.

 일제 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와 의병항쟁 재판기록에 담겨 있는 장군의 활약상은 의병을 폭도라 하고 군자금 징수를 강도나 갈취로 친일분자를 양민으로, 침략자인 군경을 치안담당자로 표현하고 있어 내용을 잘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의병장 김동수와 그 예하부대들이 한 활동을 일제 측 기록에서 발췌하여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동수 의병장은 양진여의 부하로 1908년 12월 25일 5~6명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면장 집에 60원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거절당하자 그를 구타하고 그로부터 짚신 50켤레를 징수하였다. 1909년 1월 12일에 광주군의 이장집에 들어가 총기로 위협하면서 20원을 강요하였으나 돈이 없어 백목 2필을 탈취했다.

 1909년 2월 하순에 광주 오치동의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하고 백목 3필만 탈취했다. 1909년 2월 30일부터 15명과 함께 총기를 들고 5월까지 광주,화순,담양,창평,장성 등지를 횡행했다.

 1909년 3월 15일에 동장집에 들어가 백목 4필을 탈취했으며, 20일에는 장성군에 사는 최봉근 집에 2명과 함께 들어가 군도 1자루를 탈취했다. 1909년 3월 23일에는 광주군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5원을 갈취했으며, 29일까지는 광주를 무대로 계속 활동했다.

 또한 1909년 4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7차례에 걸쳐 현금과 백목 탈취,교전으로 인한 3명의 전사자와 총 9정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09년 5월 19일에 광주시 유덕동에서 광주분견소 고요오 상등병 일행이 김동수가 이끄는 약 50명의 의병을 공격하여 14명을 죽이고, 화승총 10정을 빼앗아 갔고, 31일에 광주경찰서  순사부장 외 11명이 광주시 본촌동 김영조 집을 포이하여 4명을 죽이고 의병장 김동수를 부상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김동수 의병장은 체포되어 그의 활동상을 은폐시키고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김동수 의병실기 』(1986), 『광주시보』(이상식, 198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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