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양상기(梁相基) : 1833~1910

양상기(1883~1910)는 진여의 아들로 부자 의병장이다.

 호는 설죽으로 1883년 10월 10일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 현 중흥동 498-1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부친이 세운 풍정암에서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닦았다. 광주진위대 병졸이었던 그는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진위대 출신을 배경으로 광주경찰서 순사가 되었다.

 그러나 부친이 거병을 준비 중인 시점에 순사로의 취업은, 일제의 정보를 캐내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따라서 그의 광주경찰서 순사직은 오래갈수 없었다.

  1908년 4월 23일 그는 순사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리고 1908년 5월, 40명으로 거병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의 의병활동은 다음해인 1909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양상기 부대의 규모는 최대 80여명이었고 주로 황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도총장 안판구, 후군장 이문거, 포군장 안영숙, 도선봉장 조사윤, 참모장 유병기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도통장 안판구는 구식 군대였던 진위대 조장 출신이었고, 참모장 유병기와 도선봉장 조사윤은 김태원 의병장의 참모와 부하 출신이다. 또한 참모장 유병기는 당시 거유였던 송병선의 문하이기도 했다. 이는 양상기 부대가 구식군인이 참여한 평민부대였고, 김태원 의병장이 죽은 후 그 부대를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양반 출신인 유병기의 합류나 부장들의 나이가 전부 의병장인 양상기보다 많았다는 것은 양상기 의병장이 어떤 인물이지를 잘 말해 준다.

 '한국의 복구'를 주창했던 양상기 부대의 활동은 군자금 모금, 밀고자 및 일진회원 처단, 헌병분견소 방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끈질긴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1908년 11월부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그 중 1909년 4월의 동복 서촌 전투에서 1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1909년 5월의 담양 덕곡리 전투에서는 2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하였다. 양상기 부대가 대패를 당한 것은 무기의 열세도 있었지만, 토착민들의 밀고로 인한 기습 때문이었다.

 담양 덕곡리 전투 이후 양상기 부대는 정상적인 활동을 전개 할 수 없었다. 이에 양상기는 1909년 6월 상순 부대를 해산하고 잠행 중 1909년 12월 20일 전북 남원에서 붙잡혔다.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사건이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동일의 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했다. 1910년 8월 1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27세의 젊은 나이였다.

 2011년 광주광역시 북구에서는 도로명 주소를 부여하면서 그의 의병활동을 기리기 위해서 임동 신안교에서 일곡동 동아아파트 뒤편 일곡교차로까지의 도로명을 '설죽로'라고 명명하였다.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실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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