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양진여(梁振汝) : 1860~1910

양진여(1860~1910) 는 휘는 진영, 호는 서암, 본관은 제주로 1860년 5월 11일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 현 중흥동 498-1번지에서 남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진여는 1908년 7월 20일경 삼각산 죽취봉에서 30여 명으로 거병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거병의 목적은 일인 관리를 살육하고 각지에 침임하고 있는 일인을 물리쳐 독립국으로 복구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의병 부대의 확충을 위해 진력했고, 그 결과 1908년 11월에는 100여 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부대의 주 무기는 화승총이었지만, 양총과 대포, 권총도 보유하고 있었다. 대부분 광주와 인근 지역의 농민들이었지만 해산 군인이 참여하기도 했다. 주 활동무대는 광주를 근거지로 한 인근의 장성, 담양, 창평 등이었다.

  거병 초기 일본인 우편체송인을 살해하는 등 일본인을 응징하기도 했지만, 일본군 토벌대의 주 토벌 대상이 되면서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1908년 10월의 신촌전투와 11월의 대치.추월산 전투가 그것이다.  그가 전투를 통해 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그의 의병 부대의 피해도 막심했다.

 특히 추월산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15명의 의병이 순절하였다. 이후 그의 의병부대는 크게 위축되었다. 1909년 2월 연합 의진을 구성하여 총대장으로 추대되지만, 지병과 부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3월 이후 그의 의병부대는 사실상 와해된 채 부대원의 일부는 아들인 양상기 의병부대에, 그리고 일부는 부하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양진여는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에 잠복했지만, 부왜인의 밀고로 1909년 8월 26일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그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1910년 5월 30일 아들 양상기보다 두달 앞서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1992년 10월,  광주시에서는 그의 의병활도을 기리기 위해서 서방사거리에서 전대사거리를 거처 동운고가도로까지의 도로명을  '서암로'라고 명명하였다.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실기』(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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