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충효동


● 동명의 유래 


충효동(忠孝洞)은 본래 광주군 석저면의 지역으로서 성안 또는 성내, 성촌이라 부르다가, 조선 제22대 정조가 선조 때의 충신ㆍ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생장한 곳이라 하여 충효리로 사명하여 불린 이름이다.



* 닥메(柚山)마을


▶ 마을의 유래

닥메마을은 마을 뒷산의 모습이 닭의 모양을 닮아서 닭뫼라고 하였다고 한다. 닭뫼가 차츰 와전되어 닥메라고 불려졌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유산(柚山)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은 인천 서씨로 중종 때 앞마을인 담양의 지실마을의 서당 훈장으로 왔다가 이곳을 잠깐 들렸는데 마음에 들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 마을의 연혁

- 청동기 시대 : 충효동 성안마을 7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 통일 신라 시대 : 개산사 석등 명문을 보면 서기 891년 이 일대 이름을 석보저였다.

- 조선 시대 : 이 지역은 광주군 석보면에 속했다. 당시 이곳에 이촌, 본촌, 성촌, 평촌, 서림촌, 신촌이 있었음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홍정자 : 마을 옆으로 지금의 논 중간에 서있는 나무로 과거 그 옆에서 농사를 짓던 홍씨라는 농부가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하여 홍정자라고 불려진다

- 옥 배미 : 평뭇들 동쪽에 있는 논으로 서마지기 인데 옛 평무고을의 옥터였다고 하여 옥배미라고 한다.

- 구시 시암 : 평뭇들 북쪽에 있는 샘으로 구시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구시시암이라고 한다.

- 꾀꼬리봉 : 산의 형세가 꾀꼬리모양을 닮아서 꾀꼬리봉이라고 한다.

- 함충제 : 꾀꼬리가 벌레를 물어가는 형상을 한재를 함충제라고 한다.

- 급다리 : 닥메 서쪽에 있는 다리로 김윤제가 값진 돌로 놓은 징검다리라고 하여 이를 금다리라고 한다.

- 금다리 보 : 금다리 옆에 있는 보를 금다리 보라고 한다.

- 금다리 소 : 금다리 밑에 있는 소를 금다리 소라고 한다.


* 담안마을


▶ 마을의 유래

예전에 이 마을의 주변은 큰 장이 섰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곳 장은 주위로 담을 쌓아올려서 경계를 표시했다고 하는데 담안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이 시장의 담장 안쪽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부르다가 차츰 마을을 이루게 되어 이 마을을 담안 마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이 마을이 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의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구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동림(東林)마을


▶ 마을의 유래 

동림마을은 꾀꼬리가 많아서 자주 마을의 동쪽 수풀에서 꾀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동쪽 수풀에 꾀꼬리가 앉아 운다고 하여 동림마을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은 400여년 전에 연일 정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 마을의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구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서틀바우 : 무등산 꼭대기에 바위가 서있다고 하여서 서틀바위라고 한다.

- 평뭇들 : 산골짜기에 넓은 들이 있다고 하여서 평뭇들이라고 한다.

- 금산 : 마을 뒷산으로 금이 나온다고 금산이라고 불렀다. 기타로 천명둑, 동리보, 매봉산, 닭맷똥산, 장안봉 등이 있다.



* 버성골(友聲)마을


▶ 마을의 유래

해마다 5~6월이면 뒷산의 꾀꼬리가 벗을 찾아 울어대는 마을이라고 해서 버성골이라고 하였으며 한자로 표기하여 우성(友聲)마을이라고도 한다. 버성골마을은 약 400여년 전에 정철의 후손인 연일 정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 마을의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황새바위 : 버성골의 앞쪽에 있는 산의 형국이 날개를 펼친 학모양이라고 하여서 황새바위라고 한다. 기타 금산, 황새고라실, 황새모퉁이, 우렁바위 등이 있다.



* 환벽마을

환벽마을의 주변은 가사문화권으로 조선시대의 여러 정자가 산재되어 있다. 이 마을에도 환벽당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의 주변으로 푸른 대나무가 많아서 벽처럼 정자를 두르고 있어서 환벽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이 환벽당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환벽마을이라 불려졌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형성한 사람은 원래는 성안 마을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성안에서 이 곳으로 이주하여 이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 마을의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환벽당 : 조선시대 김윤제가 지은 정자를 말한다.

- 용소 : 예전에 사촌 김윤제와 정철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라고 전해지는 창계천이 있는 소를 말한다.



* 수리(水里)마을


▶ 마을의 유래

수리(水里)마을은 예전에는 마을이 개의 형국을 닮아서 술리마을이라고 불려졌다고 하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술리마을이 점차적으로 와전되어 수리마을로 불려졌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광산 김씨로 충장공 김덕령의 후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 마을의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구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옛부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

- 죽배미 : 흉년 밥그릇이라고 불려졌던 논으로 아무리 큰 흉년에도 이 논에서 많은 곡식이 나와서 이 논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흉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는 논을 죽 배미라고 한다.

- 흉년밥그릇 : 죽 배미의 다른 이름을 말한다. 기타 맞밭둘 등이 있다.



* 석저(石底)마을


▶ 마을의 유래

이 마을의 주변에는 돌이 많아서 마을 어디에서나 돌을 볼 수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이 마을을 부르는 이름이 돌과 관련된 석재, 석보, 돌밑이라고 불려졌다. 흔히 지금은 돌밑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석저(石底)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된 시기는 약 300여년전으로 광산 김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20여 가구로 최씨, 김씨, 박씨, 이씨 등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 마을의 연역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본촌 덕의리 각 일부는 덕의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의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구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열시 배미 : 논이 길어서 열시 배미라고 불려졌다.

- 갈모 배미 : 모자(갈모)를 닮은 논을 말한다.

- 말리봉 : 산의 높이가 높아서 만리까지 보인다는 산의 봉우리를 말한다. 기타로 뒷골, 북당산, 데실제, 고가메 등이 있다.



* 북촌(北村)마을


▶ 마을의 유래

무등산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 마을이 북촌을 향하고 있다고 하여 북촌마을이라고 했다고 알려져 왔다. 북촌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으며, 현재 광산 김씨의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의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옛부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

- 기와 배미 : 예전에 이 곳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한다(현재 충효분교 앞의 논)

- 옥 배미 : 이 곳에 예전에 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 맞바우 : 금다리 봇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 칠성바우 : 맞바위 안에 칠성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로 수몰되어 버렸다한다. 기타로 백간당 등의 지명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성안(城內) 마을


▶ 마을의 유래

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마치 성의 안쪽에 있는 마을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성안 또는 성내마을, 안터마을이라고 불린다. 조선 정조 때 충장공 김덕령의 출생지로 22대 정조가 1788년 충장공과 그의 부인 홍양 이씨의 충절을 기려 충장리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마을의 성촌시기는 500여년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사람은 노씨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광산 김씨가 조선초기 서창에서 옮겨와 살았으며 현재는 광산 김씨가 주로 살고 있으며 17대에 이른다.


▶ 마을의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평촌, 북촌, 충효리의 각 일부는 충효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청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맛바우 : 마장이 있었다는 곳을 말한다.

- 얜구부 :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논을 얜구부라 불려졌다.

- 우무실 : 성안에 있는 들을 우무실이라고 불려졌다.

- 송곳 배미 : 논의 모양이 송곳을 닮아서 송곡배미라고 불려졌다. 기타로 동림보, 사용보, 상창들 등이 있다.



* 산장(山藏) 마을


▶ 마을의 유래

산장마을은 근래에 형성된 상가촌과 그 위의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원주민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원주민 마을은 광주시가 생기기전에 최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서 원주민 마을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원주민 마을은 이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원효사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동구였으며 원효사가 생길 때 주민들이 하나둘 몰려와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원효사와 같은 시기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 마을의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저면 원촌, 서촌, 이치(배재)리 상대곡면 화암리 일부는 금곡리가 각각 되어 광주군 석곡면에 속했음.

- 1935년 10월 1일 광산군 석곡면 충효, 금곡, 덕의리가 됨 광산읍이 광주부로 승격될 때 광주군은 광산군이 됨.

- 1955년 7월 1일 담양군 남면 충효, 금곡, 덕이리가 됨.

- 1957년 12월 2일 담양 남면에서 다시 광주시 석곡출장소 충효동이 됨. 122동을 51개 동으로 축소하고 석곡, 지산, 서창, 대촌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함

- 1961년 3월 10일 북부 출장소 관할이 됨 중부, 동부, 남부, 지산, 대촌, 서창의 8개 출장소제 실시.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석곡 출장소 충효동은 동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동구 관할의 석곡출장소 석곡동은 신설된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이 됨.

- 1998년 9월 21일 장운동, 충효동, ㅊ어옥동이 통합하여 석곡동이 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누에봉 : 누에같이 생긴 산의 봉우리를 말한다.

- 의상봉 : 의상대사가 공부를 했다는 굴이 있는 산의 봉우리를 의상봉이라 부른다.

- 까치봉 : 까치의 머리를 닮은 산의 봉우리를 까치봉이라 부른다.

- 시루봉 : 떡 시루를 닮은 산의 봉우리를 말한다. 기타 감나무골, 삼바실, 주검동, 꼬막재, 늦재, 바람재, 토끼봉 등이 있다.




- 무드리 향토사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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