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생룡동

 동명의 유래 

生龍洞은 본래 광주군 우치면의 지역으로서 생룡이라 하였는데, 1914년 내동리, 지내리, 용전리, 서작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생룡리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이곳 生龍마을은 오치동에서 일곡동과 우치공원을 지나면 나오는 마을이다. 이 마을을 지나면 龍田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변은 영산강이 흐르는 곳으로 담양에서 흘러나오는 금성천과 창평 방향에서 흘러내리는 증암천이 합수되는 곳과 인접한 마을이다. 그리고 생룡제와 대야제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 마을을 지나 영산강으로 합류되고 있다.
필자는 지명에 ‘날’계가 있음을 주장한바 있다. 왜 ‘날’계라 하였는가? ‘날’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날’은 ‘칼날’의 ‘날’에 해당하는 어사이다. ‘날’은 ‘칼’에 달려서 날카로운 ‘날’로 사물을 둘로 가르는 기능을 하는 기구이다. ‘칼’의 옛 표기는 ‘갈’이었기 때문이다. ‘날’은 이렇게 사물을 나누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을 나누어지는 곳으로 인식하여 ‘날’계 지명으로 이름을 지어 부른다 생각한다.

또 필자는 지명에 ‘갈’계 지명의 무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 한국의 지명들이 대개 물줄기가 합류되고 갈라지는 곳을 특징으로 지명을 명명하고 있음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필자는 이를 한국지명 형성의 기반이라 말한다.

위의 生龍洞은 이러한 한국지명이 생성되는 좋은 본보기에 해당하는 곳이다. 즉 물줄기가 이곳에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줄기가 바로 마을 앞에서 갈라지거나 합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옛날에는 두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에는 물의 양이 두 배로 많아지기 때문에 홍수가 내리면 그곳은 물바다가 되기 때문에 그런 곳에는 집을 살수가 없기 때문에 합류되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홍수로부터 안전한 곳에 마을을 이루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계의 힘으로 제방을 높게 쌓고 또 구불구불한 강을 바르게 함으로써 물이 더 쉽게 빠질 수 있도록 직강공사를 했기 때문에 홍수 걱정을 덜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은 물줄기가 합류되는 곳과 가까운 곳에 마을을 형성해도 큰 걱정이 없게 되었다. 위의 生龍洞의 ‘生’은 훈이 ‘낳다’이지만 ‘낳다’가 다른 명사와 함께 쓰이는 관형형이 될 때는 ‘날’로 발음하게 된다. 따라서 ‘칼날’의 ‘날’과 소리가 같기 때문에 ‘날’은 ‘生’자를 택하여 이름을 짓게 되었을 것이고 ‘龍’은 이 마을이 물줄기로 인하여 명명되는 이름이기 때문에 ‘물’이라는 의미에서 ‘龍’자를 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 생룡(生龍)마을


▶ 마을의 유래

무등산 범딕고개(도두원 고개)에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덕산에서 일곡으로 뻗어있는 줄기, 외악고개 벗골에서 쌍교(송광정)로 뻗어 있는 줄기, 그리고 이 마을 위에 있는 죽취봉으로 뻗어있는 줄기로 삼각산을 이루는데 마을 뒷산 죽취봉의 형태가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는 구불구불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생룡이라고 불려졌다 한다. 또한 비틀재, 배골, 시산골, 옥터골, 지아골로도 불려지고 있다. 이 마을은 삼국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구운기와 등의 흔적이 출토되고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그 후로 조선조 13대 임금인 인종 을사년에 나주에서 금성범씨가 처음에 지금의 용전마을(갯두배미)에 터를 잡았으나 큰 수해를 당해 지금의 생룡으로 이주하여 처음 터를 잡았다 한다.


▶ 마을의 연혁

-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 기록에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생룡동이 나타났다.

-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우치면의 내동, 지내, 생룡, 용전, 서작리 각 일부 지역이 생룡리가 되었다.

-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되었다.

-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룡동이 되었다.

-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되었다.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됨

-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조개시암것 : 논의 물이 조개만큼 조금 밖에 없어서 조개 시암것이라 불려졌다 한다.

- 방천너머 : 방천(도랑)너머에 논이 있어서 방천너머라 불려졌다 한다.

- 여시맷등 : 해질 무렵 산등성이에 여시가 자주 나와서 여시맷등이라 불려졌다한다.

- 기타 진굴, 미주굴, 모생이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지내(地內)마을


▶ 마을의 유래

마을의 형상이 마치 지내처럼 생겼다하여 지내마을이라고 불려졌는데 예전에는 내동과 지내라는 마을로 이루어져 지내동으로 불려졌다 한다. 그러나 대하 저수지의 축조로 인해 내동이 없어지고 지내라고만 불려졌다한다. 처음 마을에 터를 잡은 성씨는 금성 범씨로 전 지산 면장을 지낸 범재풍씨가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한다. 


▶ 마을의 연혁

- 조선후기 [호구총수(1789)] 기록에 지금의 이 지역으로 보이는 생룡동이 나타났다.

-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우치면의 내동, 지내, 생룡, 용전, 서작리 각 일부 지역이 생룡리가 되었다.

-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되었다.

-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룡동이 되었다.

- 1973년 7월 1일 구제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딤

-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장구 배미 : 논의 모양이 마치 장구처럼 생겼다 하여 장구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 동냥치 배미 : 논 주인이 이 논에서 나는 곡식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동냥치 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 기타 산적골, 안고랑 등의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모산(某山)마을


▶ 마을의 유래

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모산으로 불려졌다 한다. 이 마을은 예전에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을 때 한 스님이 이 마을에 탁보를 하러 왔지만 마을 사람들이 보시는 하지 않고 조롱을 했다 한다. 그래서 이 스님이 마을 사람들에게 생룡 잔등이라는 산기슭을 자르면 부촌이 된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그곳을 잘랐다 한다. 그 후 마을이 폐허가 되어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한다. 그 근거로 그곳 근처에서 구운 기와 등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후로 55년 전에 생룡에서 범씨 성을 가진 분이 이주햇 마을이 생성되었다 한다. 


▶ 마을이 연혁

-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폐합때 모산이 우치면 생룡리에 편입됨

-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이 됨

- 1957년 11월 6일 광주시에 편입되어 생룡동 관할이 됨

-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출장소 우치동 관할이 됨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서구 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우치동은 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북구 관할이 됨

-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북구 우치동 관할이 됨

- 1998년 9월 21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이 통합되어 건국동이 설치됨


▶ 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

- 제비다리 : 산 모양이 마치 제비다리처럼 생겼다하여 제비다리라 불려졌다 한다

- 무리등 : 죽취봉 기슭에 위치한 작은 봉우리가 무리등이라 불려졌다 한다.

- 수봇논 : 다른 사람의 땅을 빌어서 농사를 지었다 하여 수봇논이라 불려졌다 한다.




- 무드리 향토사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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