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삼소동

 동명의 유래 

大村洞은 이곳 주변에서는 ‘큰 마을’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불리게 된 ‘大村’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洞名이라 생각한다. 이곳 大村마을은 옛날에 三所旨面이 있었던 所在地였다. 때문에 이곳 주변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었다. ‘三所旨’는 ‘三+所+旨’로 분석되는데 ‘三’은 ‘셋’을 뜻하는 말이고 ‘所’는 음이 ‘소’이므로 지명에서 ‘牛’와 상통하는 지명어이다.
위의 ‘三所旨’라는 마을의 ‘旨’는 본래 이곳에 城이 있었거나 또는 山嶺이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마루’라는 뜻을 가진 ‘旨’자가 지명에 차자되어 쓰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차 山嶺을 뜻하는 고개는 그 기능을 잃게 되자 점차 ‘마을(村)’을 뜻하는 말로 뜻이 변질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곳 五龍洞에는 ‘잿물’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이곳에 山嶺이 있었음이 더욱 증명되고 있다 생각한다.

▶ 대촌(大村)마을의 유래

과거 이조 때 지금의 마을 뒷편 동녕골이라는 골짜기에 도적무리들이 모여 살았다 한다. 이 도적떼들은 남의 재산을 약탈해서 큰 기와집을 짓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러던 중 300여년 전 이들 무리가 문화와 문자에 조금씩 눈떠가지 시작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고 지금의 대촌마을로 이동하여 터를 잡고, 처음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동녕골 터에서는 지금도 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와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성씨는 풍천 임씨로 구전되고 있을 뿐 그 시기와 연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 뒤로 김해 김씨, 금녕 김씨 등이 유입되었다.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일제 말까지 270여호에 달한 김해 김씨의 자작 일촌이었으나 지금은 타성씨들의 유입으로 점차 산성촌이 되어가고 있다.


▶ 마을의 연혁

- 삼소지면의 소재지로 조선후기 기록인 [호수총수(1789)]의 동면에 속했다.

-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삼소지면의 상대 하대 저작리와 장성군 외동면 궁암리 일부를 합하여 본촌면 관할의 대촌리가됨.

- 1935년 10월 1일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개칭되면서 광산군 지산면 관할이 됨.

- 1957년 12월 2일 121개 동을 51개 동으로 축소 운영할 때 지산 출장소 삼소동 관할이 됨.

- 1973년 7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지산 출장소 삼소동은 서구관할이 됨.

- 1980년 4월 1일 서구 관할의 삼소동은 신설된 북구관할이 됨.

- 1998년 9월 21일 본촌, 우치, 삼소동이 통합하여 건국동이 설치되어 오늘에 이름


▶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

- 간밤 배미 : 삼소지 동남쪽에 있는 논이라서 간밤배미라 한다

- 감모 배미 : 넙디기에 있는 논으로 그 모양이 갓의 꼭대기를 닮아 감보배미라 불려졌다 한다.

- 꽃나무쟁이 시암 : 소금쟁이 시 암 위쪽에 있는 우물로 꽃나무쟁이 시암이라 한다.

- 동녕골 : 삼소지 서쪽에 있는 들로 이곳에 마을이 형성해 있었던 골이다.

- 미주 배미 : 질알배미 아래쪽에 있는 논으로 살림이 어려워 논과 메주를 바꿨다해서 불려졌다.

- 배맷등 : 삼소지 북쪽에 있는 등성이를 배밋등이라 불려졌다.

- 비락 배미 : 논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불려진 이름이다.

- 상대 : 대촌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대라 불려졌다.

- 중대 : 상대와 하대 사이에 있던 마을을 중대라 불려졌다.

- 하대 : 대촌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을 하대라 불려졌다.

- 장구 배미 : 질알배미 위쪽에 있는 논으로 장구처럼 가운데가 잘름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한장들 : 마을 남쪽에 있는큰 들을 한 장들이라 한다.

- 들박샘 : 두레박에 줄을 달아 물을 길러 먹었던 샘으로 상대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샘을 들박샘이라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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