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당산제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행해지는 마을 제사이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신신(당산 할아버지와 당산 할머니)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적 의례이다. 당산국 동제(洞祭) 당제(堂祭)라고도 한다.
제일(祭日)은 주로 음력 대보름이나 정초가 가장 많고, 그밖에 10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서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산가(産家) 상가(喪家)의 출입이나 외지출타 등을 금하고, 개고기 등의 궂은 음식을 피하고 연행을 삼가며, 목욕재계를 하는 등 매사에 근신한다. 제일이 다가오면 당산나무와 당산석신당 등 제장주변을 청결히 한 뒤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몇 줌 놓아 부정을 막는다. 제물은 화주나 제관 집에서 준비하는데 대체로 메 주(酒) 과(果) 포(脯) 편 채(菜) 등이다. 제사비용은 마을공동 제답의 수입에서 충당하거나 집집마다 추렴하여 쓴다. 제사는 대개 자정을 전후한 시간에 시작하여 새벽녘에 끝마친다. 제의는 주제자(主祭者)에 따라 진행방식이 다른데, 마을 사람 가운데 선정된 제관이 주제할 경우에는 제물진설(祭物陳設), 신주헌작(神酒獻爵), 재배, 당산축, 소지(燒紙), 퇴식, 음복 등의 순서로 유교식 절차에 따른다. 무당이 주관할 경우에는 제관이 헌작, 재배, 축문, 소지 등 간단한 제를 올린 다음 무녀와 공인이 열두거리굿으로 진행한다. 대부분의 경우 제의는 유교식 절차로 행하여지는데, 풍물을 울리는 매국(메국 또는 매구굿)과 병행하여 진행된다. 농악대가 치는 매굿은 마을제사의 시작을 알리거나 신을 맞아들이는 의미로서 치는 들당산굿이 있고, 제당의 잡귀잡신의 침입을 막고 또 쫓는 의미의 埋鬼굿, 그리고 제가 끝나고 신을 보내기 위한 날당산굿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당산제가 끝나면 마을공동 시설인 우물·창고·정자·다리 등을 돌면서 굿을 친 다음 각 가정을 방문하여 문굿·샘굿·조왕굿·마당굿 등 집안 구석구석을 돌면서 굿을 치는데, 이를 매구치기 또는 마당밟기, 지신밟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당산굿은 당산제를 전후하여 2, 3일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또한 당산제가 끝난 당일이나 그 이튿날 밤에는 마을 사람들이 동서 또는 남녀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여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이기는 쪽이 풍년이 드는데, 특히 여자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한 뒤 줄은 태워서 논밭에 거름이 되게 하거나 신체인 당산나무나 당산석 등에 감아두어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는데 이를 ‘당산 옷입힌다’고 한다. 줄을 감을 때는 부정을 가리며 감아놓은 줄에는 일년 내내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한다.

당산제는 다른 동제와 비교하여 볼 때 유교식 제사와 매국, 줄다리기가 복합 병행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또한 다른 동제와 마찬가지로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위한 제의인 한편,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즐김으로써 축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신성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은 얽혀있는 감정을 해소하는 화해의 장을 마련하고, 마을 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일체감을 가짐으로써 지역공동체의 유대를 강화시키고, 노동의 힘든 생활에 활력을 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한다.

북구 관내의 당산제는 주로 음력 정월 대보름을 즈음하여 모셔졌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지금도 모시고 있는 마을이 수적으로 많지는 않다. 상당히 급속도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마을이 해체되었고, 또 전반적으로 민간신앙에 대한 의식의 변화와 고등종교의 확산 등 여러 가지의 요인이 작용하여 이제 당산제는 거의 사라져 가는 민간신앙의 하나가 되고만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 보고된 북구의 당산제에 대한 개괄적인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1) 충효동(忠孝洞) 성내(城內) 당산제(堂山祭)
정월 보름에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마을에 궂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빌며, 제사는 화주가 맡는다. 제사방식은 유교식 절차에 따르지만, 제관의 구성이나 제물의 장만 등에서 민간신앙의 전통적인 방식이 많이 남아 있다.


2) 충효동(忠孝洞) 배재 당산제(堂山祭)
17호에 6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서 6·25 전까지 당산제를 모셔왔으나 그 후 중단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에 모시던 방식만이 촌로들 사이에 기억되고 있는데, 이 마을 역시 정월 보름에 농악대를 갖춰 당산에서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3) 충효동(忠孝洞) 평촌(平村) 당산제(堂山祭)
본래 이 마을에서는 신목으로 12당산을 모셨다. 그러나 너무 번거로워 두 당산으로 줄여 해방 전까지 모셔왔다고 한다. 마을에서 제사를 모시는 목적은 풍년을 기원하고, 귀신이나 질병으로부터 마을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4) 충효동(忠孝洞) 금곡(金谷) 당산제(堂山祭)
해방 전까지 당산제를 모셨던 이 마을에는 지금도 당터만은 남아있다.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작은 당산으로 세 곳에서 제사를 모셨으며, 특이한 것으로 작은 당산이라는 곳은 일명 꾀꼬리당산이라고도 하는데, 입석으로 되어 있다. 제사는 음력 정월 보름에 모셨다고 한다.


5) 청옥동(靑玉洞) 신촌(新村) 당산제(堂山祭)
이 마을의 당산제는 6·25전까지 모셨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당산제가 모셔지게 된 내력담이 전하고 있다. 마을 앞에 큰 내가 흐르는데, 보가 있어 어느 해 홍수에 보가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정자나무 앞에 모여 당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불러 보를 보호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정자나무에서 흰노인이 나와 막대로 갈라 물길을 잡아주었다. 그로 인해 홍수에 피해를 보지 않고 마을이 무사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을 기해 당산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6) 청옥동(靑玉洞) 분토 당산제(堂山祭)
예전에는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모셨으나 해방 후로는 지내지 않고 있다. 당산은 숫당산과 암당산으로 불리는 신목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제의 비용은 일정액을 거출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7) 청옥동(靑玉洞) 정촌 당산제(堂山祭)
해방되기 전까지 당산제를 모셨던 이 마을은 신목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웃당산과 아랫당산으로 불리었고, 매년 정월 보름이면 제관들을 뽑아 당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당산제를 지내고 난 다음 날 마을민들이 모여 음복을 하고, 또 이 때 가정에서 짚을 한 단씩 가지고 나와 줄을 다려 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


8) 청옥동(靑玉洞) 화암(花岩) 당산제(堂山祭)
꽃바우라고도 부르는 이 마을은 6·25사변 이후로 당산제가 끊겼다. 12당산이 마을에 있었다고 전하는데, 매년 정월 보름에 제관을 선정하여 당산에서 제사를 모셨다. 제비는 ‘지붕머리돈’이라고 하여 호구전으로 갹출하여 썼다. 노인들 중에는 다시 당산제를 모셨으면 하는 사람도 있으나 마을의 젊은 층에서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9) 문흥동 대문산 당산제
대문산 마을 입구에는 할머니 당산이라 부르는 괴목나무 숲이 있는데 당산의 좌우에 용과 호랑이라 부르는 선돌 2기가 지키고 있으며, 당산제가 중단된 지 2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 푸르름은 여전하다. 짓봉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마을 정면에는 대주 아파트 단지가 자리잡았으며 마을을 빙 둘러 감싼 형국으로 광주로 진입하는 남해고속도로 동광주 교차로가 있다.

대문산의 주요 성씨는 입향조인 제주 양씨와 김해 김씨 등이며 상주인구는 569명, 호수는 125호인데 대부분이 농업에 생활근거를 두고 있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음력 정월 7일이나 8일경에 주민들이 모여서 그 해의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등을 뽑으면서 시작된다.

제관의 선정은 엄격한 법도가 있어서 산고나 상을 당하지 않았고 3년 이내 성주를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생기복덕이 맞는 남자를 선정하고 금기에 들어간다.

당산제의 제물준비는 1월 12일 천정장(泉町場 : 오늘날 양동시장)을 이용했는데,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은 성격이 달라 각각 따로 구입한다. 제물에 쓸 물건값은 깍지 않으며 제관은 매년 사기 그릇을 새로 사는데 제가 끝난 뒤 화주에게 주었다.

주요 구입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실과, 제관, 쇠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등이며 제주는 미리 담근 청주를 쓴다. 제물 준비를 할 때에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입에는 입마개를 했으며 음식의 간을 보질 않는다.

화주와 제관 등은 당산제 전날, 당산 주변과 마을 입구는 물론이요, 각자의 집 안팎을 정결히 하고 13일에 큰 무등 등에서 파온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끼운 금줄을 쳐서 잡인의 출입을 막았다.

당산제를 잘 지내기 위해 제관, 축관, 화주, 집사는 물론이요, 온 마을 주민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는데 특히 제 지내기 삼일 전부터는 비린 음식을 일체 먹질 않고 심지어 젓갈이 들어간 김치도 먹지 않는다.

제관, 제주, 화주로 선정된 사람들은 화장실만 다녀와도 찬물로 손발을 씻거나 목욕을 하는 정결함을 유지하며 부정한 일이나 장소에도 가질 않고 잡인과의 상면도 피했다. 당산제의 순서는 할아버지 당산에서 14일 자정쯤에 제를 먼저 지낸 다음, 닭이 운 뒤에야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올린다. 마을 뒤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둘레가 열두 아람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는데 8·15해방 전 태풍으로 인하여 밑둥이 부러진 뒤, 그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들이 숲을 이뤄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나무가 서 있던 자리는 문흥동 421번지로 지금은 김용현씨댁 마당자리에 해당된다.

할아버지 당산은 산신의 성격이 강해 금기사항이 많은데 그 중 당산제의 제물도 가려서 비린 생선류는 일체 쓰질 않는다.

화주 집에서 준비한 제물은 당산으로 옮길 때에는 햇물을 들거나 떡시루, 찰밥 시루 등을 각각 든 18명의 남자들만 참여한다. 제물은 시루떡, 삼색실과, 나물, 돼지머리 등을 진설하고 매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식인데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 강산-참신-초헌-독축-개반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된다.

독주문의 내용은 당산신에게 마을의 무사태평과 재앙을 막아주며 풍년이 들도록 기원한다. 축문의 구체적 문안은 중단된 지가 오래되어서 찾아 볼 수 없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따로 준비한 제물로 진설을 하는데 할아버지 당산에 비해 제물도 생선류가 추가되어 다양하고 넉넉하며 풍물도 흥겹게 친다.

진설과 제의절차는 동일하나 시작과 끝 부분에 풍물이 있는 점만 다르다. 할머니 당산나무 밑에는 제단처럼 쓰이는 밑 부분을 파고 돼지머리와 함께 제물을 조금씩 나눠 한지에 싸서 묻는다. 당산나무 밑둥에는 높이 136cm 너비 70cm 둘레 165cm인 입석이 박혀 있다.

당산제가 끝난 뒤 15일 오전 중에 당산제 때 준비한 재물의 음복을 겸하여 마을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목청계를 열어 그 해의 품삯이나 공동관심 사안 또는 머슴의 새경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할머니 당산 옆에는 1927년 정묘 삼월에 건립한 정자가 있고 몇 개의 입석과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간 길이 90cm의 용과, 높이 55cm, 길이 100cm인 호랑이라 부르는 자연석이 마을을 향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서 있는 위치나 당산나무와의 관련성을 생각건대 입석신앙 유물로서 마을 수호신 성격의 선돌이라 생각된다.

당산제가 끝난 15일부터는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마당밟기를 하였는데 이 때 거두어진 돈과 곡식 등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사용하였다.

엄격한 금기를 지키며 모든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지내오던 대문산 당산제는 이제 단절되고 말았다.

당산제 후 집집마다 일정량의 볏짚을 내어 마을 안 사거리에서 줄을 드리는데 괴목나무에 3합의 줄을 걸고 50미터쯤 되는 큰 줄을 만든 다음 마을을 양지와 음지로 편을 갈라 풍년을 기원하는 외줄다리기를 2월 초하루에 실시했으나 이제는 보기 힘든 민속이 되어 버렸다.(광주직할시 향토문화총서 8집, 문흥동 문화유적 지표조사, 1991)


10) 문흥동 소문산(送亭) 당산제
소문산은 현재의 대주아파트 자리에 있던 여술마을과, 6·25때 피난 와서 정착한 월남민들의 정착마을(혹은 수용소) 그리고 현재 터의 송정마을을 통틀어 소문산이라 부른다. 소문산의 주요 성씨는 경주 김씨로 22호이고, 상주인구는 386명, 총 호수는 98여호로 농업이 대부분이다.

송정이란 마을 명칭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회동댁(양규율씨 조모) 집 앞에 있던 마을의 할아버지 당산인 커다란 소나무 때문에 생겼다고 구전된다. 밑둥이 성인 5명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만큼 커다란 소나무가 해방 이후 큰바람에 부러진 뒤 없어져 버렸다. 할머니 당산은 통장인 김치호씨 집 앞에 있었는데 수종은 귀목나무이며 둘레는 성인의 6발정도 되는 거목이었다.

소문산의 당산제는 현재 중단된 상태이나 20여년 전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해 지내왔다고 전한다.

당산제의 준비는 현재 중단된 상태이나 20여년 전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해 지내왔다고 전한다. 당산제의 준비는 음력 1월 10일 저녁 마을회의에서 그 해의 운세와 생기복덕이 맞고 궂은 일이 없는 사람을 선발하는데 제관은 초, 아, 종헌관으로 3명, 축관, 화주 3명을 뽑아서 각각의 임무를 부여하면서 시작된다.

제관은 김내문(작고), 축관은 김신원(작고)씨가 주로 맡았다. 제의 비용은 용머리돈이라 부르는 호구전으로 충당했으며, 제물은 음력 1월 12일 종방 옆 버드내 천정장(현 양동장)에서 구입하는데, 화주내외를 포함하여 4명이 구입한 뒤 저녁 늦게야 동네에 돌아온다.

주요 제물은 생선으로 부서와 북어, 대추, 밤, 곶감, 배, 소고기, 돼지머리, 시루떡, 3채나무와 초, 향 등이며 당산제에 쓸 제기는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는 목기를 쓰며, 제주는 화주 집에서 준비한 청주를 쓴다. 1월 13일이 되면 화주와 제관 집 그리고 마을 입고와 당산주변에 왼새끼 금줄을 치고 마을 뒤 북덕산(경주김씨 선산)에서 파온 황토를 소복하게 세 군데씩 놓아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

제관과 화주 축관들은 제관으로 선정된 이후 철저히 금기생활을 하는데, 마을 들샘에서 찬물로 목욕하고, 상가 출입을 하지 않고 잡인과의 접촉도 피하는데 대소변 후 목욕재계하는 등 정성을 기울인다.

1월 14일 밤 10시쯤 제관과 축관들이 화주집에 모여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을 각기 나눠 제 지낼 준비를 한 다음, 자정에 쇠, 징, 북, 장고, 나발, 소고 2명으로 짜여진 풍물패를 앞세우고 남자들만 할아버지 당산으로 간다. 부정탄 사람은 지골 맞는다는 속신 때문에 당산에 가질 못했다고 한다.

제순은 유교식 절차를 따르는데 진석-인사굿-초헌-개반삽시-풍물-아헌-축문-종헌-소지-충물-헌식 순으로 이어진다. 헌식은 돼지머리를 한지로 싸서 당산 밑에 묻고 나머지 음식은 화주 집으로 옮겨 보름날 아침에 나눠 먹는다.

당산제의 축문은 전하지 않으나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1924년 갑자년에 호열자가 창궐하여 부득이 당산제를 한번 중단한 적은 있었으나 그 후 일제의 중지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당산제를 지내오다 광복이후 몇 차례 지낸 뒤 6·25를 전후하여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닭이 울고 나야 따로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지낸다. 축문의 내용 일부만 다를 뿐 기타 제례 절차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다. 당산제를 모두 마친 제관, 화주, 축관 등은 이레 동안 출입을 삼가고 근신한 뒤 대문에 두른 금줄을 거둬 당산 밑에 가서 불을 사뤄 묻는다.

보름날 아침 화주집에서 준비된 제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음복을 한 뒤, 그 해의 당산제를 결산하고 마을의 공동안건을 논의하며 품삯과 머슴의 새경, 공동작업을 결정하는 마을회의가 열린다. 회의를 마친 뒤 화주집에서 풍물을 치고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16일부터는 마을 안 샘굿을 시작으로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문굿-마당굿-조왕굿-천룡굿 등을 치며 잡귀잡신을 쳐내고, 명과 복을 빌어 그 집의 태평을 기원하는 마당밟기를 한다. 쇠, 징, 북, 장고, 속 등이 굿을 이루고 농악대 뒤끝에 잡색들이 따르는데 양반, 망구, 도령, 포수, 초랭이, 중, 조빡광대, 조리광대(농악대를 선도하고 온갖 장난을 치며 마당밟기의 경비 등을 거둬들임) 등이 흥을 돋운다. 이때 거둬진 경비는 마을의 공동계에서 관리한다.(광주직할시 향토문화 총서 8집, 문흥동 문화유적 지표조사, 1991)


11) 문흥동 평교(平橋) 당산제
대문산과 송정마을의 당산제는 중단된 지 20여년이나 됐지만 평교에서는 지금도 약식화된 다산제를 매년 지내오고 있다.

평교는 현재의 두암동과 각화동, 문흥동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물려 있다. 대문산과 송정마을을 평교와 구분 짓는 남해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대문산과 송정마을의 진입로에 해당되는 평교마을의 당산에는 수령 70년쯤 되는 괴목나무인 당산할아버지와 단기 4288년 을미년에 세운 정자 1동 그리고 독영감이라 부르는 80cm 높이의 입석 하나가 남아있다.

매년 음력 1월 14일 저녁에 간단한 제물을 준비하여 당산제를 지내는데, 요즈음은 예전과는 달리 신명난 풍물도 빠지고 토박이 몇 가구만 남아서인지 주민들의 호응도 시원치 않은데다 젊은 층은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아 87세인 김길암 옹과 예전의 상쇠로서 당산제때 풍물판을 이끌던 정용을(81세)옹이 당산제의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평시에 지내는 당산제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음력 1월 14일 자정쯤에 제관격인 김길암 옹과 정용을 옹이 풍물패를 대동하고 삼색실과와 북어 몇 마리를 제물로 갖추어 소주를 제주로 하여 동네의 평안을 기원하는 약식의 당산제를 유교식 절차에 따라 지낸다.

과거 동네가 성할 때는 풍물도 흥겹고, 제 자체도 경건함이 있었으나 설장고 가락이 일품이던 서금수옹이나 북가락이 뛰어난 김용득옹 등이 모두 타계한 지금은 농사짓던 이웃들마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나 버리고 도회지의 변두리로 변한 지금은 모든 게 시들하고 신명도 없어져 상쇠를 맡았던 정영감님의 쇠가락만 외롭게 남아있게 되었다.

평교마을은 마을 터가 배(舟)형국인지라 보름날 아침 동네사람 몇이서 20자 남짓의 가죽나무 짐대 2개를 준비하여 그 꼭대기에 각각 오리 1마리씩을 앉히고 입에는 대를 쪼개어 물린다.

다산 할아버지 옆에 1기를 세우고, 하나는 현재의 남해고속도로 한복판쯤에 동네 좋으라고 세웠으나 8·15해방 후 단절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마을의 당산 근처를 짐대거리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청과물 시장 건너편 교도소 옆은 장승이 서 있었기 때문에 장승배기라 불렀다고 한다.

대정팔년(1919)에 호열자가 크게 번져 이 마을에 큰 피해가 속출하자 음력 8월 3일로 날을 받아 천제를 지냈는데, 정결한 몇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하고 당산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깐 다음 생쌀과 조를 제물로 하여 정성껏 제를 지낸 뒤 밤새워 굿을 치다가 술을 마시고 모두 당산 부근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이 동네는 시끄러워 도저히 더 있을 수 없으니 이제 도동고개(마을 인근고개)로 넘어가자고 하더니 월봉댁(제보자 ○○의 외조모)만 데리고 병귀들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 당산 옆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에게 현몽되어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과연 그 다음날 꿈에 말한대로 월봉댁만 호열자로 죽고 나서는 마을에서는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대문산과 소문산에 열병이 유행했으나 평교에서는 당산의 영험으로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매년 정월 보름에는 할아버지 당산에 더더욱 정성을 다해 제를 지내왔으나 이제는 지금은 몇 분 안되는 노인들만의 행사로 치러지고 있다.


이외에도 북구 관내에는 광주 첨단과학산업기지 지역내의 오룡동 신흥마을 당산제, 대촌동 대촌마을 당산제, 오룡동 치촌 당산제 등이 있다. 이제 당산제의 명맥은 언제 그칠지 모를 위기에 봉착해 있다.(광주직할시 향토문화 총서 8집, 문흥동 문화유적 지표조사, 1991)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