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기우제

당산제가 정기적으로 매년 올려지는 것에 반해, 기우제는 한발이 심해 농사가 크게 위협을 받게 되면 올리는 임시제(臨時祭)의 성격을 가진다. 과학적 사고와 관개용수가 발달한 관계로 지금에 와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민속이 되었다. 그러나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가뭄이 계속되면 마을 단위나 행정관청 단위로 제사를 크게 올렸다. 기우제가 올려졌던 사례를 들어본다.


1) 문흥동 기우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당산제에 비해, 가뭄이 심할 때만 한시적으로 지내는 기우제는 과학문명의 발달과 농업의 현대화에 따라 과거의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짓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든 의식이 되고 말았다. 농사의 젖줄인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일제의 침략기에는 곡창인 호남벌에 수많은 저수지를 축조하였는데 대문산과 소문산의 마을 사이에도 이 때 저수지가 만들어졌으나 토사가 밀리고 수량이 적어 이제는 낚시터 정도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대문산과 소문산 그리고 평교에서 지냈던 기우제로는 33년 전인 기해(1959)년 음력 7월에 가뭄이 혹심하여 문화동 인근의 농민들이 두암동 군왕봉(무제등)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로 합의하고, 기우제 비용으로 각 호당 50원씩 갹출했다.

기우제 준비를 위해서 화주에 장익호, 이흥호(작고)씨를 선출하고 제관은 문화동 초대 동장을 지낸 곽정희(남, 현 각화동 거주)외 2명을 뽑아 제를 추진하였다.

화주와 제관의 금기와 몸가짐은 당산제를 지낸 때보다 더 엄하다고 한다. 기우제의 순서는 확실히 밝힐 수는 없으나 유교식 제 절차로 분향-진설-상신-헌작-독축-소지-헌식 순이다. 정결한 한복에 갓을 쓴 제관들이 동서남북 방향에 비를 내려주십사하는 배례와 천제에게 비는 기우제문을 간곡하게 읽은 뒤 헌식으로 생돼지머리를 땅에 묻고 산꼭대기에 불을 크게 피웠더니 과연 3일 뒤에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기해년 가뭄의 원인은 신성한 군왕봉 정상이 명당으로 소문이 나 누군가 몰래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농민들과 여자들이 앞장서서 군왕봉 정상을 파헤치자 양림동 최부자집 모친 명정이 나오자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준비해간 오물을 사방에 뿌리고 산을 내려오자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 후 파묘 문제로 소송이 생겨 기우제를 주관했던 제관 등이 파출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나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우제의 덕을 본 각화동 하성대(작고)씨의 주도로 기우제를 지낸 제관과 화주 등을 위로하는 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2) 충효동(忠孝洞) 금곡(金谷) 기우제


몇 십년전 기우제를 지냈던 사례가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 찾아진다. 마을 뒷산 인금산 중턱에 제단이 있다. 마을에서 회의를 하여 제일을 정하게 되면 마을민 모두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지킨다. 그리고 몇 사람의 제관을 선정하여 제사준비에 들어간다. 제비는 마을에서 걷어 쓰는데 호구전으로 하였다고 한다. 제물로는 몇 가지 음식과 돼지머리, 산닭을 쓴다. 저녁 무렵 제관들은 제물을 가지고 산에 오른다. 제단은 산중턱에 있는 너른 바위다. 옆에는 밤을 새워 불을 지필 수 있을 만큼 많은 나뭇단을 마을의 젊은이들이 전날 준비해 놓는다.

자정 무렵 제사를 지낸다. 제물을 진설하고 유교식 제차에 따라 제사를 한다. 제사가 일단 끝나면 산닭의 목을 잘라 제단(바위) 주위에 뿌린다. 피로 신성한 제단을 더럽혔으니 비를 내려 씻도록 하라는 일종의 주술적인 비원이다.

또 이 마을에서는 마을의 아낙네들이 키를 가지고 마을 앞 개울가에 나가 곡식을 까불 듯이 물을 떠서 까불기도 했다. 물을 까불면서 ‘비가 온다. 비가 온다.’ 하고 외쳐댄다. 비가 오는 모습을 의사한 일종의 유감주술이다.(광주직할시, 문화재도록, 1990)

  • 이전글이전글 없습니다.
  • 다음글당산제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