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충효당산제(忠孝堂山祭)

충효당산제(忠孝堂山祭)


무등산 북쪽 자락에 있는 충효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석저면(石底面) 지역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 성안처럼 되어 있어 '성안' 또는 '성내(城內)'마을로 불리다가 조선 22대 정조 때 김덕령 장군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 하여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이 하사(下賜)되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석곡면(石谷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담양군 남면(南面), 1957년 광주시 충효동, 1998년 석곡동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효마을의 성촌 시기는 450여 년 전으로써 대부분의 주민이 충장공의 후손들이 광산김씨이기에 마을 입구의 충장공 비각과 취가정 등 충장공과 관련된 유적도 잘 관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충장공의 탄생 설화를 안고 있는 430여 년 된 왕버들 3그루는 2012년 10월 5일 천연기념물 제539호로 지정되었다.

충효당산제는 마을이 생긴 이래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음력 정월대보름에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당산제를 모셔왔으나, 많은 주민들이 광주시내로 이주하고 젊은이들은 미신이라 하여 참여하기를 꺼려해 근래에는 구색만 갖추어 할아버지당산에만 모시고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모정 곁의 수령이 500여 년 되는 귀목이었으나 오래전 벼락을 맞은 후 새로 가지를 친 것이라고 한다.

매년 정월 초 마을 연장자로 순으로 제관 3, 축관 1, 집사 4인이 선출되면 이들은 제를 모실 때까지 금기사항을 지킨다. 특히 화주는 곶은 데를 피하고 부부 잠자리 등을 하지 않는다. 

제비는 마당밟이로 거둔 성금을 모아 마련한 동답(洞畓)에서 나온 것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13일에 집사와 부녀회원이 목욕 후 재래시장에서 값을 깍지 않고 제물(미역, 김, 가조기, 삼실과 등)을 구입하며, 제기는 목기로 마을에 보관하여 사용한다.

14일에는 주민들이 각 가정과 마을 안팎, 마을공동우물 등을 깨끗이 청소하고 공동우물에 그릇에 촛불을 담아 띄워 정화시키며 제물을 부녀회원집에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간이나 맛을 보지 않고 마련한다.

당산제 당일에는 마을 입구, 당산, 제관, 축관집에 왼손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으며, 저녁 9시경 할아버지당산 앞에 모닥불을 지피고 농약대가 화주댁을 시작으로 마을 공동샘, 할아버지당산 순으로 풍물을 친 후 음식을 진설하고 당산제를 지낸다.

제물 운반은 남자들이 흰옷과 흰장갑 착용 후 부녀회원집에서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제물을 머리에 이고 운반하여 진설한 후 초헌-메 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 순으로 이루어지며, 축문은 예전 것이 길고 어려워 짧게 줄여서 사용한다.

소지는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소지 후 동민소지를 올리고,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약간씩 덜어 흰 종이에 싸서 묻고 돌로 눌러 놓는다.

제물 중 돼지는 한 마리를 잡아 머리는 제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당산제 후 삼우날 마을 주민들이 화주집에 모여 제물과 돼지고기를 나누어 먹고, 그 뼈는 땅에 묻는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충효당산제는 정월 3일~5일 경에 마을회의에서 그 해의 운세를 점쳐보고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사람 중 연장자를 우선하여 제관 3인, 축관 1인, 화주 1인, 집사 4인 등을 뽑으면서 시작된다. 제관들은 제를 모시기까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는데 특히 화주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궂은 곳을 다니지 않으며,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해서도 안되고 대·소변을 보면 찬물로 목욕을 해야하기 때문에 먹는 음식을 줄이기도 하였다.

제비(祭費)는 마을 공동답(共同畓)이 있어서 수확된 쌀로 충당했으나, 1957년 충효리가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공동답을 팔아 마을 공익사업에 사용한 후부터는 『지붕머리돈』이라 하여 한마지기의 동답(洞畓)을 다시 마련하여 당산제의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13일이 되면 화주와 집사가 목욕재계를 하고 양동시장에 나가 배석, 시루, 그릇 등 제기와 미역, 김, 가조기, 삼실과 등 제물을 일괄 구입하는데 값을 절대로 깍지 않고 지불한다. 제사에 쓰일 돼지머리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사용하며 나머지 부분은 당산제를 지낸 후 삼우날 마을 사람들이 화주집에 모여 나누어 먹는다.

14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각 가정과 마을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화주집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한다. 제물 장만에 사용되는 물은 전날 저녁 동네 청년들이 마을공동우물을 모두 펴내고 깨끗이 청소하고 난 후 새로 솟아 오른 물을 14일 첫 새벽에 길어다 쓴다. 마을 사람들도 조상들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화주가 제물을 준비할 때에는 머리에 흰 수건을 스고 입은 마스크로 가리며 간을 안하고 맛도 보지 않는다. 상에 올릴 떡은 동답(洞畓)에서 수확한 쌀로 만든다. 또한 마을입구와 당산, 제관, 화주댁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저녁 9시경 할아버지당산 앞마당에 모닥불을 지피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농악대를 구성하며 서로 가락을 맞춰 보고 굿을 준비한다. 농악대는 제를 모시기 전에 굿을 치는데 화주댁을 시작으로 마을 공동샘, 할아버지당산, 충효초등학교 순으로 진행된다. 그동안 마을 사람 중 궂은 일이 없었던 남자들은 흰옷과 흰 장갑을 착용하고 화주댁에 모여 제물을 운반하며 당산제 준비를 서두르는데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운반한다. 충효마을 당산제에서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따로 제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자정 무렵이 되면 농악대가 할머니당산을 할아버지당산으로 모셔 오면 운반해 놓은 음식을 진설하여 당산제를 시작한다.

제는 진설-초헌-메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축문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이 너무 길고 어려워 짧게 줄여서 사용하고 있으며, 소지는 축관이 먼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소지를 드리고 나면 제에 참여한 제관, 농악대, 연장자 순으로 동민소지를 올린다. 지신을 달래기 위한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약간씩 덜고 돼지머리에서 코, 귀, 입술을 떼어내 흰 종이에 싸서 묻는데 짐승들이 파먹지 못하도록 돌로 눌러 놓는다. 이로써 충효마을 당산제의 모든 절차가 끝나게 된다.

다음 날 아침에는 마을 주민 모두가 화주집에 모여 제를 지내고 남음 음식과 마을에 잡았던 돼지고기를 먹으려 흥을 돋은 후 마당밟이를 한다. 『광주의 당산제』(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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