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용전당산제(龍田堂山祭)

용전당산제(龍田堂山祭)


용전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우치면(牛峙面) 지역으로 풍수지리상 마을의 지형이 배가 흔들리는 형국이라 하여 해유로 불리다 어느 해 홍수가 있은 후 물이 흔한 마을이란 뜻으로 낙촌(洛村), 용전(龍田)이라 불리게 되었다. 1957년 광주시 우치동에 편입되었다 1998년 9월 21일 건국동에 통폐합되었다.

용전마을의 성촌 시기는 약 300여 년 전 진주정씨(晉州鄭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금은 주로 농업과 하우스 농사(묘목, 원예, 딸기, 참외, 고추 등)를 하고 있다.

용전마을은 마을 중앙의 할아버지당산과 마을 아래쪽 할머니당산에 매년 음력 정원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일제시대 노남용(소작회의 회장) 씨에 의해 당산나무가 베어진 후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가 20여 년 전부터 옛 용전장터 자리에 있는 왕버들나무에 제관 3명(노인회장, 용전들노래보존회장, 장년회장 등)과 집사 2명을 정하여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제비(祭費)는 전년도 마당밟이를 통해 모은 자금과 북구청 지원금으로 준비하며, 제물은 삼실과, 나물(간을 하지 않음), 돼지머리, 포, 떡 등을 준비한다.

14일 오전에 마을입구와 당산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목마다 뿌려 부정을 막으며, 제의는 유교식으로 진행한다.

제관은 백색 한복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며, 제물은 부녀회에서 마련하여 진설한다. 현재 제기는 일회용 접시를 사용하고 있으나 추후 마을제기를 마련할 예정이며, 당산제에는 제관, 화주, 성인남자, 농악대만 참여하며 소지는 마을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진행된다.

헌식은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땅에 묻으며, 참가한 사람 모두 음복한 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당밟이를 집집마다 한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용전당산제는 정월 14일 밤 자시(子時)에 모셨다. 제관은 정월 초 닷 세날 마을회의에서 아들이 많고 학식이 있는 어르신을 제관과 축관으로 정하고 화주는 깨끗한 사람으로 뽑았다. 제비(祭費)는 마을자본으로 나오는 이자로 충당했으며 제물은 삼실과, 나물, 돼지머리, 밥, 떡 등을 준비했다. 제상에 올릴 나물에는 간을 하지 않는다.

14일 오전에는 마을입구와 당산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목마다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밤 10시쯤 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나발을 불었으며 제관의 복장은 백색 한복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썼다. 화주집에서 장만한 음식들은 깨끗한 사람들이 당산까지 가지고 가서 진설을 하였으며, 마을제기가 따로 있어 목청에 보관해 두었다 사용하였다. 한밤중에 제를 지내므로 화톳불을 피우는데 거기에 쓰이는 장작은 각 가정에서 거두어서 사용했다.

돼지머리의 위턱은 할아버지 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진설하며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에는 농악대, 제관, 축관, 화주와 성인남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소지는 마을 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하며 헌식은 할머니당산에 헌식터가 있어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땅에 묻는다. 그리고 참가한 사람 모두가 차려진 음식을 음복한다. 당산제가 모두 끝나면 나발을 불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다음 날 마을에서는 마당밟이가 시작되는데 동네 공동 샘을 시작으로 당산나무를 거쳐 마을로 들어와 집집마다 굿을 친다. 그리고 정월 25일이 되면 이장선출 및 올해의 품삯을 정하는 마을회의를 연다. 『광주의 당산제』(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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