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총 2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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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산당산제(文山堂山祭)
- 문산당산제(文山堂山祭) 문산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오치면(梧峙面문)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산(文山)과 신흥(新興)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문흥리'가 되어 서방면(瑞坊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 마을의 당산신은 할아버지당산나무와 할머니당산나무가 있다. 할아버지당산나무는 마을 뒤쪽에 둘레가 열두 이름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으나, 8·15 해방 전 태풍으로 밑 둥이 부러진 뒤 그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그 숲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문산공원 내에 할아버지당산나무 한 그루만이 홀로 서 있다.할머니 당산나무는 수령이 4백여 년이 된 2그루이며, 느티나무공원 내에 있다. 할머니당산나무 사이에는 높이 136㎝, 너비 70㎝, 둘레 165㎝인 입석이 박혀 있다. 과거 당산 정면에 마을을 수호하는 2개의 입석(왼쪽 입석 개 형상, 오른쪽 입석 돼지 형상)이 더 있었는데 택지개발 당시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해방 이전에는 당산제를 지낼 때 줄다리기를 하고 줄을 이 입석에 감고 풍년을 기원하였다고 한다.당산제는 마을이 택지개발사업으로 편입되면서 없어졌다가 1998년 제주양씨문중을 중심으로 한 무난당산축제 개최를 계기로 현재는 문산당산제추진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 즈음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문산당산제는 문산당산제추진위원회에서 음력 정월에 제관 4, 축관 1, 화주 1, 집사 2을 선정하면서 시작되며, 제비는 관심 있는 주민들의 참여로 마련하고 제물은 통장단이 당산제 3~4일 전에 말바우시장에서 가격을 깍지 않고 구입하여 당산제 전날 음식을 장만한다.제물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쓸 제물(돼지머리, 삼실과, 제기, 쇠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청주 등)을 각각 따로 구입하며, 제기는 마을공동의 목기제기를 준비하여 명지아파트에 보관하여 사용한다.당산제 7일 전에 당산 주변과 마을입구, 제관 등의 집을 정결히 하고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기운 금줄을 펴서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당산제 진행순서는 당일 오전 9시에 길놀이로 할아버지당산에 이르러 제를 지낸 후 다시 길놀이로 할머니당산에 와서 11시경에 제를 지낸다. 제관과 통장단이 협력하여 제물을 진설한 후 유교시으로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강신-참신-초헌-독촉-개밥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하며, 음복은 당산제 이후 주민 모두가 모여 떡국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대신한다.광주시립민소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문산당산제는 음ㄺ 정월 7일이나 8일경에 주민들이 모여서 그해의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등을 뽑으면서 시작되었다. 제관은 엄격한 법도에 의거 산고(産故)나 상(喪)을 당하지 않았고 3년 이내 성주를 하지 않은 남자를 선정하며, 제 지내기 3일 전부터는 비린 음식을 일체 먹지 않으며 화장실만 다녀와도 찬물로 손발로 씻거나 목욕을 하는 청결함을 유지하며 부벙한 일이나 장소에도 가지 않고 집안과의 상면도 피했다.당산제의 비용은 마을주민 모두의 정성을 모은 인구전으로 충당하였으며, 제물은 1월 12일 양동시장을 이용하며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은 성격이 달라 각각 따로 구입하낟. 제물에 쓸 물건 값은 깍지 않으며 제기는 매년 사기그릇을 구입하여 제가 끝난 뒤 화주에게 주었다.주요 구입물품은 돼지머리, 삼실과, 제기, 소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등이며 제주(祭酒)는 미리 담근 청주를 쓴다.제물 준비를 할 때에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입에는 입마개를 했으며 음식의 간을 보지 않는다.화주와 제관 등은 당산제 전날 당산 주변과 마을입구, 각자의 집 안팎을 정결히 하고 13일에 큰 무등 등에서 파온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기운 금줄을 펴서 잡인의 출입을 막았다. 당산제의 순서는 할아버지당산에서 14일 자정쯤에 제를 먼저 지낸 다음, 닭이 운 뒤에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올린다.할아버지당산은 당산의 성격이 강해 금기사항이 많은데 그중 당산제의 제물도 가려서 비린 생선류는 일체 쓰지 않는다. 화주집에서 준비한 제물을 당산으로 옮길 때에는 횃불을 들거나 떡시루, 찰밥시루 등을 각각 든 18명의 남자들만 참여한다. 제물은 시루떡, 삼실과, 나물, 돼지머리 등을 진설하고 메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시인데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 강신-참신-초헌-독축-개반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된다.독축문의 내용은 당산에게 마을의 무사태평과 재앙을 막아주며 풍년이 들도록 기원한다. 축문의 구체적 문한은 중단된 지가 오래되엇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마을 앞 할머니당산에서 따로 준비한 제물로 진설을 하는데 할아버지 당산에 비해 제물도 생선류가 추가되어 다양하고 넉넉하며 풍물도 흥겹게 친다.할머니당산의 진설과 제의 절차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나 시작과 끝부분에 풍물이 있는 점만 다르다. 당산제가 끝난 뒤 15일 오전 중에 당산제 때 준비한 제물의 음복을 겸하여 마을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목청계를 열어 그 해의 품삯이나 공동관심사 또는 머슴의 새경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당산제가 끝난 15일부터는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마당밟이를 하였는데 이때 거두어진 돈과 곡식 등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사용하였다.당산제 후 집집마다 일정량의 볏짚을 내어 마을 안 사거리에서 줄을 드리는데 과목나무에 3합의 줄을 걸고 50미터쯤 되는 큰 줄을 만든 다음 마을을 양지와 음지로 편을 갈라 풍년을 기원하는 외줄다리기를 2월 초하루에 실시했으나 이제는 보기 힘든 민속이 되어 버렸다. 『광주의 상잔제』(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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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전들노래
- 광주 북구 용전동은 농촌의 모습을 간직한 마을로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과 봉산면, 장성군 삼소면이 맞닿고, 영산강 상류 드넓은 농토를 끼고 있다. 영산강 상류에는 생용․용주․신용․실용․용두․오룡․용산․용강 등 '용'과 관계되는 마을 이름이 전한다. 이에 용전동은 '용이 노니는 들판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며, 그 일대에서는 1960년대 말까지 들노래가 구전되어 오다가 그 맥이 끊겼다.광주광역시 북구청은 전통민숙문화계승발전 사업 추진에 따라 1998년부터 1년간 용전동을 방문하여 주민들로부터 들노래에 관한 녹취와 김동언, 김귀천, 김달영의 자문 및 증언과 (故)지춘상 전남대 명예교수의 고증, 전통풍물연구회 '한마당'의 도움으로 용전들 노래를 재현하였으며, 1999년 6월 23일 북구청소년수련관에서 첫 재현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용전들 노래는 1999년 7월 12일 용전동 농토현장에서 재현되었고, 7월 24일 구동체육관에서 열린 제 1회 광주광역시 민속예술축제에서 최우수상을, 9월 15일 제주도에서 개최된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종합우수상(국무총리상)을 수상함으로서 전국에 들노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용전들노래보존회 발족과 '용전들노래기념비'가 건립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용전들노래의 전승계보를 살펴보면, 마을 사람들의 오래된 기억 속 들노래의 앞소리꾼은 (故)정종석이다. 정종석은 꽹과리를 잘 다루고 상여소리를 할 수 있는 마을의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13년 동안 1대 보존회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용전들노래를 지켜온 김동언을 있게 한 초석이 되었다. 또한 김동언의 뒤를 이어 현재 용전들노래의 앞소리꾼인 정여아 김양숙에게도 많은 음악적 영감과 가르침을 주었다용전들노래보존회는 처음 보존회가 구성된 1999년부터 2011년까지는 (사)광주지산용전들노래보존회(제1대회장 김동언)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2012년 2기 임원진을 구성하면서 현재의 명칭인 (사)용전들노래보존회(제2대 회장 표범식)로 바꾸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그 활동 사항을 살펴보면 매년 북구청의 지원을 받아 1회의 정기공연과 2~3회의 비정기 공연을 하고 있다. 정기공연은 10월 전후, 비정기 공연은 7월 유두절 한마당 공연과 기타 외부행사 등을 통하여 용전들노래를 널리 알리고 있으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전승활동과 시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용전들노래 가사1. 모판만들기 소리 : 진양조장단의 긴소리와 자진모리장단의 자진소리로 구성⓵ 긴소리(미도소리) (받는 소리) 오위에라 / 오위 우리 금주 심은 나무 / 삼정승이 물을 주어 육판서 뻗은 가지 / 팔도감사 꽃이로세 꽃이 피고 열매 열어 / 각골수령으로 다나간다 오동추야 달이 밝고 / 님의 생각 절로 난다.⓵ 자진소리 (받는 소리) 오위에라 / 아 오위 무등산 상상봉에 / 감감는 / 저구름아 이 산정이 어쩌간아 / 떠날 줄을 / 모르느냐 아마도 이 산정이 / 신선님들 / 논곳일세2. 모찌기 소리⓵ 긴소리(먼들소리) (받는 소리) 오 애리 먼들 올 농사를 잘 지어서 / 선양봉양 하여보세 모타래가 안 풀어지게 / 획 돌려서 잘들묶세 이 모를 어서쪄서 / 저 바닥에 심어보세 첫째로는 나라사랑 / 둘째로는 부모봉야⓶ 자진소리 (받는 소리) 오 애리 먼들 이 농사가 풍년되야 / 동지섯달에 생일세네 모 찌기일은 멀었는데 / 한 그릇 생각이 웬말인가 잎 담배를 짝짝 찢어 / 조대통에 붙여보세 큰애기 솜씨로 술을 빚어 / 총간 막으면 장가를 가지 울 넘어 담 넘어 깔비는 총각 / 눈치만 있으면 떡받아 먹소 다 되었네 다 되었네 / 모찌기가 다 되었네3. 모심기 소리⓵ 긴소리(상사소리) (받는 소리) 여여허루 상사뒤여 한일자로 늘어서서 / 입구자로 모를 심세 먼대 사람 듣기 좋게 / 북장구 장단에 모를 심세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 뒷산은 점점 가까오네 상사소리는 어디갔다 / 때만 찾아 돌아온다 일락서산 해는지고 / 한그릇 생각이 절로 나네⓶ 자진소리(자진 상사소리) (받는 소리) 여여허루 상사뒤여 어우러진다 어우러진다 / 상사소리가 어우리진다 여기도 심고 저기도 심고 / 빈털없이 상사로세 저건너 대포리봉에 / 비가 달북묻어온다 우장을 허리두르고 / 삿갓을 쓰고 다 되어가네 다 되어가네 / 이 논배미가 다되어가네4. 논매기 소리⓵ 초벌매기(마뒤여소리) (받는 소리) 어리시구나 / 아하 아 / 마뒤여어 / 마뒤여 어허 / 불러보세 불러보세 [어그럿체] 어허 허잇 / 우리네 농군님네 노래나 한자리 / 불러를 보이세 어허 / 다 잘도하시네 다 잘도하시어 [어그럿체] 어허 허잇 / 우리네 농군님네 한분도 빠짐없이 / 다 잘도 허시오이 어허 / 광주나 우치동 쌍새앞에 [어그럿체] 어허 허잇 / 생초나 씻는 저 처녀야 / 생초나 씻어갖고 갈 나름이지/ 길가는 도령잡고 무슨 장난을 / 하느냐 그려 어허 / 우치동 지아리 만덕할멈 [어그럿체] 어허 허잇 / 자네딸 잘났다고 자랑을 / 말소에 어허 / 하룻 저녁을 지켜보니 [어그럿체] 어허 허잇 / 한가쟁이 따는 똥을 싸고 / 한가쟁이 따는 오줌을 지렸네 그려⓶ 초벌매기(지화자절시구) (받는 소리) 지화자 절시구 남원산성 오동목은 / 장구통으로 다나가고 뒷동산 먹감나무 / 할량 북채로 다나간다 오란다네 오란다네 / 광주처녀가 오란다네 씨암닭 잡아놓고 / 단둘이 먹자고 오란다네⓷ 한벌매기(떨어지는소리) (받는 소리) 아하 아하 떨아지 떨아 널치잡고서 떨어지 떨아 잘도나 헌다고 떨어지 떨아 우수 풍작이 떨어지 떨아 풍년을 맞았다고 떨어지 떨아 다마금 좋다고 떨어지 떨아 날만 새면 떨어지 떨아 비 묻어 온다고 떨어지 떨아 풍년을 맞았다고 떨어지 떨아⓸ 만드리(오호소리) (받는 소리) 오호- 호호호호 에루 / 사하아덩실로 다 되야가네 다 되야가네 / 이 논 글수가 다되어가네 이마위에 흘린땀은 / 방울방울 향기나고 손가락에 묻은 흙은 / 댕이댕이 황금일세 여보소 농부님네 / 갈정막자고 술동이 떳네 막거리 한잔 홍어 한점도 / 서로 권해야 사랑이 들고 삼복가뭄에 한줄기 물도 / 갈라 대야만 복이 온다네 일락서산 해는지고 / 월출동령에 달 솟아온다 보리쌀 뚜물에 호박죽 끊여라 / 징금징금 먹어보세4. 장원질 소리⓵ 장월질소리(풍장소리) (받는 소리) 어리사 / ~ / 저리서 / ~ / 좋 / 네 앞뒤에 / 가래는 / 너울너울 / 춤 추고 머슴은 / 가래 메고 / 황소 / 타고 농군은 / 흥에 겨워 / 춤을 / 추네 놀다가 / 가세 놀다가 / 가세⓶ 방개둥개 (받는 소리) 에헤 / 헤 / 에헤 / 헤헤루/ 어럴럴 / 거리고 / 방개둥개로 / 노세⓷ 아롱다롱 (받는 소리) 아롱대롱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 삼천리 강산에 풍년이 왔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 계수나무 누웠으니 동으로 한쌍 뻗은 가지 / 북으로 한쌍 뻗은 가지 금도끼로 찍어내어 / 은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지어 / 양친부모 모셔놓고 천년 만년 살고지고 / 천년 만년 살고지고 『용전들노래의 역사와 문화』(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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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구 신룡동 : 신거무 장의 유래
- 거가 지원고을이여. 담양 신평마을에 살던 홍주 송씨가 진월고을 원님으로 왔는데, 민치도 잘하고 지방통치를 잘할라면은 신거무를 조심해라.주변에서들 그랬는데, 신거무를 조심하란 것이 신거무를 없애부란 말로 알았어. 제일 위험한 인물인께 그래서 뚜드려서 없애부렀단 말이여. 그런디 신거무 죽은 뒤로 며칠 안가서 신거무 죽은 귀신한테 새 원님이 죽게되았어. 뭐 흰거미, 독거미가 나와서 원님 부랄을 물어서 죽었다고 글던가, 어쨌든 죽은 원님의 생이를 뜸고 간데, 생이가 못가요. 신거무 죽은 귀신이 생이 앞에서 가로막고 춤을 추고 있은께. 그래서 그 송원님 아버지가 송미암 선생인디, 나와가지고 보니까 아들 생이가 못가고 잡귀가 앞에서 춤을 추면서 못가게 하거든, 다른 사람 눈에는 안보인디, 미암선생 눈에만 뵈여. 그래서 생이를 내리라고 했어. 그래놓고 네가 누구냐 그런께 신거무라고 하거든. 그래서 왜 그러냐 물으니, 나를 무고하니 이렇게 죽엿다. 그러니 내 원한을 풀어줘야 하겠다. 그러거든. 그래서 관을 꺼내어 가지고 자기 아버지가 회초리로 때렸단 말이여. “네 이놈! 민치를 잘하고 행정을 잘하라고 그랬제. 신거무를 죽이라고 그러디 이놈아! 그런 법이 어디있냐!”고 관을 내려다가 두들겼다는 것이다. 그런께 신거무가 “반분이나 풀립니다. 분이 좀 풀립니다” 그러더란 것이여. 그것이 사실인가 어쩐가 몰라도 그래서 “그러면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러니 “여기다 장터나 하나 만들어 주쇼. 그러면 애가 거그서 귀신이나 얻어먹고 살아야겄습니다” 그래서 송미암이 장을 하나 세워줬다는 것이여. 그것이 신거무장이여. 그런디 신거무장은 파짝 장이 돼야. 제일 늦게 가는 놈이 그 날 죽어 장을 세었어도 잘돼는디, 제일 늦게 가는 사람이 죽어. 근께 얼른 싸서 도망가야제. 석양 제일 늦게 간 사람이 죽은께. 그래서 나중에 장이 없어져불고 비야 장터로 옮겨갔다는 것이여. 사람이 죽어싼께, 그래서 신거무장이 유명하재. 이 신거무장 이야기는 어떤 사람들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하고 결부시켜서 후백제 건국인 제2인자 견훤의 아들인 장수 신검의 이름이 송미암 선생의 아들은 죽인 흰거미하고 발음이 비슷한께 신거무를 이름이 붙여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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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룡동 : 연제동과 새암
- 연제동 가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통시암 걸이란 데도 있고, 화전들이란 데가 있다.원래 연제란 이름은 그곳에 장구봉이란 산이 있는데, 거기가 담양 전씨들의 새암산인데 연꽃모양의 명당이 있다 해가지고 붙은 이름인데, 연제동은 풍수학상으로 터가 매 형국이다. 이 마을은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꽤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이 물이 귀하다. 마을은 굉장히 큰데, 거기서 한 500m 전방에 통시암 걸이라고 들판 속에까지 가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 그렇게 물이 귀해서 마을 사람들은 새암을 굉장히 원했다. 새암을 아무리 구할라고 해도 물이 나올만한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먼데서 길러다 먹었는데, 하루는 중이 와서 물었다. 그런데 마을의 부자되는 이가 성질이 괴팍해서 시주를 안했다. 추측키에 그 때가 이조 초기 억불정책을 쓸 때라 그러지 않았는가 싶은데, 아무튼 중이 보니까 마을에 새암이 없어서 먼데서 퍼다 먹으니까 그 중이 마을 복판에서 새암을 잡아줬다. 여기다 새암을 파면은 물이 잘 나오고 좋을 것이다 하고 그랬더니 물이 잘나오고 참 좋았는데, 배 한가운데를 구멍을 파버렸으니 샐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 700m 가면은 통시암 걸이 있고, 화전들이 있고 들판에 꽃바우가 있고 들판에다가도 모두 꽃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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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촌동 : 삼소지
- 옛날 일제시대부터는 없어져 버렸지만, 삼소지면은 그대로 구 한국시절에 삼소지면으로 됐고, 옛날 지명으로 봐서는 이곳은 반쪽은 장성군이었다. 이곳은 외동면 주암리라고 했는데, 이 곳 학교를 옛 지명을 따서 주암국민학교라고 명명을 했다. 그런데 주암국민학교가 어디 있냐고 문의가 많이 들어왔다. 순천 승주의 주암초등학교 모두들 알고 있어. 그런 폐단이 많아서 삼소국민학교로 개칭을 하자고 했으나 위에서 안된다고 해서 그대로 명명을 하고 있다.물형으로 봐서 주암의 주자는 배주자이다. 근처의 지명에 맷등이라는 곳도 있고, 배를 맨다고 해서, 그 위에 배맷등이라고 있고 이 근처에는 밑등이라고 해서 배를 매놓은 물형이 되어가지고 있어. 예전 문헌을 보면은 장성군 외동면 주암인데 그때는 진원면 산동 전체가 한동네였던 모양이지요. 그때는 때니까. 그렇게 지형같은 것은 그런 것이여. 여그서 특별히 농요를 발굴한 것은 없으나 여러 가지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마을이 한 250년 가량의 역사뿐이다. 이제 여러 성시가 들어와 제법 큰 마을이 되었었는데 이제 첨단과학기지로 이곳을 떠나야 하니 떠나기는 싫지만 국가시책이니 어쩔 수 없지요.삼소지는 그전에 외동면 주암리가 형성된 다음에 구한국시절에 삼소지면이 됐는데, 그 후 대촌면으로 되었어요. 삼소지라는 것도 내가 칠십살이지만 삼소지라는 이름이 될만한 일을 겪은 것이 없다. 아마 광주군으로 편입하면서 삼소지면으로 한 것 같다.삼소지라고 하면 글자 어원이 삼소라고 두 글자인데, 이러한 경우는 대개 한자로 쓸 경우에 두 개의 단어로 된 경우가 많은데, 삼소라고 한 것은 한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말로서 어떤 말이 변해서 삼소지로 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예를 들어서 면 이름을 지을 때 비아면은 새로 생겼지만 월계리가 천곡이었거든요. 예전에는 비아면에 천곡이란 곳이 없었습니다. 천곡이란 곳이 샘골이라는 곳인데, 이곳이 바로 월계리 뒤에 큰물이 잘 나는 샘이 있어서 거기서 때왔을 것이다. 지금도 샘이 있다.보통 옛날에 면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그 지역의 소재지가 될 만한 마을의 지명을 따온 경우도 있지만 여러 마을을 합하다 보면 큰 두 마을의 한 글자씩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경우도 많다. 법정리를 만들 때에도 그렇게 해서 대개 두 글자로 지명을 만드는데 삼소지처럼 석자로 만든 지명은 아주 드물다. 백제 때 지은 지명은 석자가 많다. 그래서 삼소지라는 지명이름이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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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촌동 : 서출동 유수
- 서쪽에서 물이 흘러가지고 동쪽으로 내린다는 말이제. 옛날에 물 좋기로는 첫째 설금(화순 동복) 둘째 응암했었어. 그렇게 여기 응암물이 좋다. 이곳은 저수지가 필요가 없었다. 이 마을에 통새암이 있고 물캐방죽이 있는디 이 두 방죽물로 농사를 짓고도 남았다.인제는 방죽도 필요없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한해도 많았다. 아무리 한해가 심해도 우리 마을은 걱정없었다. 통새암이라는 곳에다는 애기 못난 사람이 공을 드리고는 했다. 그래서 아들 낳은 사람도 있다. 옛날에는 통새암이 아주 깊고 컸는데 지금은 작아져버렸지만 지금도 그 물을 먹을 수는 있다.지금은 경지정리해서 필요없게 되어서 방치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우리 마을의 물을 얘기하면서 서출동 유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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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촌동의 당산나무 이야기
- 이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당산나무의 잎을 보고 그 해의 풍흉을 점을 쳤다. 풍년이 들려면 잎이 한물로 대번에 핀다. 만약 두물로 피면 모내기도 한번에 못하고 두어 번으로 나눠서 하고, 세물, 네물로 피면 가물어서 모내기도 여러 번 나눠 심는다. 당산나무 중 하나는 귀목이고 다른 하나는 팽나무다.당산나무는 함부로 자르거나 꺾지도 못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당산나무를 불땐 적도 없다. 당산나무가지를 불때면 동태난다 해가지고 작은 가지도 꺾어서 때지 않았다. 동태난다는 말은 사람이 아프고 병이 난다는 말이다. 옛날에 지금은 돌아가신 분이지만 나무가 귀해서 당산나무의 싹다리를 가져다 불때다가 그 후로 통 목을 움직이지를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또 예전 어른들에 의하면 동네에 도둑놈이 들어오다가도 당산나무 앞에 오면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도둑질도 해가지 못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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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새끼
- 춘추새끼란 말은 토끼가 알 낳아가지고 닭이 주어먹었다는 것이데,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해뜨는 방향이 동쪽 즉 卯방이고 해가 지는 방향은 酉방이다. 즉 해가 토끼 방에서 떠서 닭 방으로 진다고 한 것으로 풀이를 한다. 그러니까 하루 즉 낮이라고도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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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출동 : 궁중바우
- 궁중바우는 월출동의 다리를 놓고 있는 부근에 있는 바위이름이다. 예전에 홍수가 져서 냇물이 동네에까지 닿았을 때, 어떤 사람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낚시질을 했다. 그 바위가 굉장히 컸다. 비가 많이 와서 궁중바위가 물에 떴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났었다. 지금은 냇속에 쪼그맣게 있는데, 그 바위 밑이 무척 깊다. 그 바위 밑 마을이 궁암인데, 바위 이름을 따서 궁암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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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요
- 민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서 전해지는 노래를 두루 일컫는다. 특정 개인의 창작이거나 아니거나 창작자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악보에 기재되거나 글로 쓰이지 않고 구전된다. 엄격한 수련을 거치지 않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악곡이나 사설이 지역에 따라 노래부르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노래부를 때의 즉흥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민요는 이런 특징을 지니기에 민중의 소리이고,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예술이라고 평가된다.민요는 이 지역 주민들의 공통된 생각과 느낌을 노래한 것이다. 따라서 이 민요는 그 시대에 상응하여 주민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가요문학이요, 민간음악이라 하겠다. 사실 이 민요는 이 지방 주민의 생활사와 그 연원을 같이 하면서 삶의 애환을 읊어 시가음악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러한 민요는 이 지방 주민의 각계각층에서 형성, 유통되어 왔기 때문에 그 범위가 넓고 내용이 다양하다.민요의 기본적인 형태는 생활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는 것이고 그 가운데 노동요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노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 행동통일을 할 수 있고 흥겨워서 힘이 덜 들기 때문에 노동요는 전통적인 노동의 거의 전 영역에 걸쳐 구비되어 왔고 노동의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려졌다. 노동요는 최초의 민요이고 다른 여러 가지 민요를 파생시킨 모체라고 할 수 있다. 북구 지역의 경우 농업을 주로 하는 지역이 많아 특히 농업노동요가 많다.내방요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녀자의 한을 노래한 팔자노래와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노래한 시집살이노래가 많다. 또한 정련요는 임에 대한 짝사랑을 노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광주 북구는 모든 분야에서 이 지역 발전의 중추적 구실을 하여 왔으므로 이 지역 나름의 토속적인 전통민요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다만 이 지역이 광산구와 밀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양쪽 지역의 민요가 공통점과 유사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아래에 소개하는 민요는 문흥동 문화유적지 지표조사에 실려있는 내용이다.1) 농요<밭노래>못다맬 밭 다 매고 나니금봉채를 잃고 가네금봉채를 찾을라면내 품안에 잠들고 가소.놀다가세 놀다가세오늘 저녁에 어찌 그리 좋단가.(제보자 : 1991. 8. 27. 문흥동 625, 김윤덕, 여, 65세)2) 부요<세월아>세월아 봄철아오고 가지를 말어라아까운 이내 청춘이다 늙어 간다.세월아 봄철아갈라거든 네나 가제요네 청춘아가거나 간게(제보자 : 1991. 8. 24. 문흥동, 정순희, 여, 69세)3) 정요<사랑노래>나 죽었다고맘사줄 말고나 살은 동안날 섬겨 주소큰 애기 꽃따러 가는데구름은 더덩실비실로 가네(제보자 : 1991. 8. 25. 문흥동, 주혜순, 여, 83세)<과부노래>저그저 금천 비개안단목초로 선을 둘러둘이 비자고 지었던 비개혼자서 비고 잠을 자니비개 넘어로 눈물이 흘러 흘러서한강수 되었네(제보자 : 1991. 8. 25. 문흥동 514, 유덕순, 여, 67세)4) 오락요<화투타령>정월 솔아 속히 커라이월 매조 화사허도다삼월 사꾸라 산란헌 마음사월 흑사리 초시절에오월 난초 날아든 나비유월 목단에 살짝 앉어칠월 홍사리 홀로나 누워팔월 공산 달도 밝다구월 국화 서리맞은 잎에시월 단풍에 다 떨어졌네동짓달 오동 비 삼십에백설만 남기고그 많은 인생 가버리도다.(제보자 : 1991. 8. 27. 문흥동 324, 김을봉, 여, 77세)이제 이와 같은 민요는 상업주의의 산물인 유행가 또는 대중가요가 보급되고, 또 한편으로는 농촌사회의 전통적 생활방식마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크게 위축 받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민요는 그들의 일상생활과 직업생활에서 완전히 잊혀진 노래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