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22
게시물 검색 폼
  • 용전들노래
    광주 북구 용전동은 농촌의 모습을 간직한 마을로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과 봉산면, 장성군 삼소면이 맞닿고, 영산강 상류 드넓은 농토를 끼고 있다. 영산강 상류에는 생용․용주․신용․실용․용두․오룡․용산․용강 등 '용'과 관계되는 마을 이름이 전한다. 이에 용전동은 '용이 노니는 들판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며, 그 일대에서는 1960년대 말까지 들노래가 구전되어 오다가 그 맥이 끊겼다.광주광역시 북구청은 전통민숙문화계승발전 사업 추진에 따라 1998년부터 1년간 용전동을 방문하여 주민들로부터 들노래에 관한 녹취와 김동언, 김귀천, 김달영의 자문 및 증언과 (故)지춘상 전남대 명예교수의 고증, 전통풍물연구회 '한마당'의 도움으로 용전들 노래를 재현하였으며, 1999년 6월 23일 북구청소년수련관에서 첫 재현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용전들 노래는 1999년 7월 12일 용전동 농토현장에서 재현되었고, 7월 24일 구동체육관에서 열린 제 1회 광주광역시 민속예술축제에서 최우수상을, 9월 15일 제주도에서 개최된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종합우수상(국무총리상)을 수상함으로서 전국에 들노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용전들노래보존회 발족과 '용전들노래기념비'가 건립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용전들노래의 전승계보를 살펴보면, 마을 사람들의 오래된 기억 속 들노래의 앞소리꾼은 (故)정종석이다. 정종석은 꽹과리를 잘 다루고 상여소리를 할 수 있는 마을의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13년 동안 1대 보존회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용전들노래를 지켜온 김동언을 있게 한 초석이 되었다. 또한 김동언의 뒤를 이어 현재  용전들노래의 앞소리꾼인 정여아 김양숙에게도 많은 음악적 영감과 가르침을 주었다용전들노래보존회는 처음 보존회가 구성된 1999년부터 2011년까지는 (사)광주지산용전들노래보존회(제1대회장 김동언)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2012년 2기 임원진을 구성하면서 현재의 명칭인 (사)용전들노래보존회(제2대 회장 표범식)로 바꾸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그 활동 사항을 살펴보면 매년 북구청의 지원을 받아 1회의 정기공연과 2~3회의 비정기 공연을 하고 있다. 정기공연은 10월 전후, 비정기 공연은 7월 유두절 한마당 공연과 기타 외부행사 등을 통하여 용전들노래를 널리 알리고 있으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전승활동과 시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용전들노래 가사1. 모판만들기 소리 : 진양조장단의 긴소리와 자진모리장단의 자진소리로 구성⓵ 긴소리(미도소리)    (받는 소리) 오위에라 / 오위    우리 금주 심은 나무 / 삼정승이 물을 주어    육판서 뻗은 가지 / 팔도감사 꽃이로세    꽃이 피고 열매 열어 / 각골수령으로 다나간다    오동추야 달이 밝고 / 님의 생각 절로 난다.⓵ 자진소리    (받는 소리) 오위에라 / 아 오위    무등산 상상봉에 / 감감는 / 저구름아    이 산정이 어쩌간아 / 떠날 줄을 / 모르느냐    아마도 이 산정이 / 신선님들 / 논곳일세2. 모찌기 소리⓵ 긴소리(먼들소리)    (받는 소리) 오 애리 먼들    올 농사를 잘 지어서 / 선양봉양 하여보세    모타래가 안 풀어지게 / 획 돌려서 잘들묶세    이 모를 어서쪄서 / 저 바닥에 심어보세    첫째로는 나라사랑 / 둘째로는 부모봉야⓶ 자진소리    (받는 소리) 오 애리 먼들    이 농사가 풍년되야 / 동지섯달에 생일세네    모 찌기일은 멀었는데 / 한 그릇 생각이 웬말인가    잎 담배를 짝짝 찢어 / 조대통에 붙여보세    큰애기 솜씨로 술을 빚어 / 총간 막으면 장가를 가지    울 넘어 담 넘어 깔비는 총각 / 눈치만 있으면 떡받아 먹소    다 되었네 다 되었네 / 모찌기가 다 되었네3. 모심기 소리⓵ 긴소리(상사소리)    (받는 소리) 여여허루 상사뒤여    한일자로 늘어서서 / 입구자로 모를 심세    먼대 사람 듣기 좋게 / 북장구 장단에 모를 심세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 뒷산은 점점 가까오네    상사소리는 어디갔다 / 때만 찾아 돌아온다    일락서산 해는지고 / 한그릇 생각이 절로 나네⓶ 자진소리(자진 상사소리)    (받는 소리) 여여허루 상사뒤여    어우러진다 어우러진다 / 상사소리가 어우리진다    여기도 심고 저기도 심고 / 빈털없이 상사로세    저건너 대포리봉에 / 비가 달북묻어온다    우장을 허리두르고 / 삿갓을 쓰고    다 되어가네 다 되어가네 / 이 논배미가 다되어가네4. 논매기 소리⓵ 초벌매기(마뒤여소리)    (받는 소리) 어리시구나 / 아하 아 / 마뒤여어 / 마뒤여    어허 / 불러보세 불러보세 [어그럿체]    어허 허잇 / 우리네 농군님네 노래나 한자리 / 불러를 보이세    어허 / 다 잘도하시네 다 잘도하시어 [어그럿체]    어허 허잇 / 우리네 농군님네 한분도 빠짐없이 / 다 잘도 허시오이    어허 / 광주나 우치동 쌍새앞에 [어그럿체]    어허 허잇 / 생초나 씻는 저 처녀야 / 생초나 씻어갖고 갈 나름이지/    길가는 도령잡고 무슨 장난을 / 하느냐 그려    어허 / 우치동 지아리 만덕할멈 [어그럿체]    어허 허잇 / 자네딸 잘났다고 자랑을 / 말소에    어허 / 하룻 저녁을 지켜보니 [어그럿체]    어허 허잇 / 한가쟁이 따는 똥을 싸고 / 한가쟁이 따는 오줌을 지렸네 그려⓶ 초벌매기(지화자절시구)    (받는 소리) 지화자 절시구    남원산성 오동목은 / 장구통으로 다나가고    뒷동산 먹감나무 / 할량 북채로 다나간다    오란다네 오란다네 / 광주처녀가 오란다네    씨암닭 잡아놓고 / 단둘이 먹자고 오란다네⓷ 한벌매기(떨어지는소리)    (받는 소리) 아하 아하 떨아지 떨아    널치잡고서 떨어지 떨아    잘도나 헌다고 떨어지 떨아    우수 풍작이 떨어지 떨아    풍년을 맞았다고 떨어지 떨아    다마금 좋다고 떨어지 떨아    날만 새면 떨어지 떨아    비 묻어 온다고 떨어지 떨아    풍년을 맞았다고 떨어지 떨아⓸ 만드리(오호소리)    (받는 소리) 오호- 호호호호 에루 / 사하아덩실로    다 되야가네 다 되야가네 / 이 논 글수가 다되어가네    이마위에 흘린땀은 / 방울방울 향기나고    손가락에 묻은 흙은 / 댕이댕이 황금일세    여보소 농부님네 / 갈정막자고 술동이 떳네    막거리 한잔 홍어 한점도 / 서로 권해야 사랑이 들고    삼복가뭄에 한줄기 물도 / 갈라 대야만 복이 온다네    일락서산 해는지고 / 월출동령에 달 솟아온다    보리쌀 뚜물에 호박죽 끊여라 / 징금징금 먹어보세4. 장원질 소리⓵ 장월질소리(풍장소리)    (받는 소리) 어리사 / ~ / 저리서 / ~ / 좋 / 네    앞뒤에 / 가래는 / 너울너울 / 춤 추고    머슴은 / 가래 메고 / 황소 / 타고    농군은 / 흥에 겨워 / 춤을 / 추네    놀다가 / 가세 놀다가 / 가세⓶ 방개둥개    (받는 소리) 에헤 / 헤 / 에헤 / 헤헤루/    어럴럴 / 거리고 / 방개둥개로 / 노세⓷ 아롱다롱    (받는 소리) 아롱대롱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 삼천리 강산에 풍년이 왔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 계수나무 누웠으니    동으로 한쌍 뻗은 가지 / 북으로 한쌍 뻗은 가지    금도끼로 찍어내어 / 은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지어 / 양친부모 모셔놓고    천년 만년 살고지고 / 천년 만년 살고지고  『용전들노래의 역사와 문화』(2013) 
    더보기
  • 문산당산제(文山堂山祭)
    문산당산제(文山堂山祭) 문산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오치면(梧峙面문)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산(文山)과 신흥(新興)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문흥리'가 되어 서방면(瑞坊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 마을의 당산신은 할아버지당산나무와 할머니당산나무가 있다. 할아버지당산나무는 마을 뒤쪽에 둘레가 열두 이름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으나, 8·15 해방 전 태풍으로 밑 둥이 부러진 뒤 그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그 숲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문산공원 내에 할아버지당산나무 한 그루만이 홀로 서 있다.할머니 당산나무는 수령이 4백여 년이 된 2그루이며, 느티나무공원 내에 있다. 할머니당산나무 사이에는 높이 136㎝, 너비 70㎝, 둘레 165㎝인 입석이 박혀 있다. 과거 당산 정면에 마을을 수호하는 2개의 입석(왼쪽 입석 개 형상, 오른쪽 입석 돼지 형상)이 더 있었는데 택지개발 당시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해방 이전에는 당산제를 지낼 때 줄다리기를 하고 줄을 이 입석에 감고 풍년을 기원하였다고 한다.당산제는 마을이 택지개발사업으로 편입되면서 없어졌다가 1998년 제주양씨문중을 중심으로 한 무난당산축제 개최를 계기로 현재는 문산당산제추진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 즈음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문산당산제는 문산당산제추진위원회에서 음력 정월에 제관 4, 축관 1, 화주 1, 집사 2을 선정하면서 시작되며, 제비는 관심 있는 주민들의 참여로 마련하고 제물은 통장단이 당산제 3~4일 전에 말바우시장에서 가격을 깍지 않고 구입하여 당산제 전날 음식을 장만한다.제물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쓸 제물(돼지머리, 삼실과, 제기, 쇠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청주 등)을 각각 따로 구입하며, 제기는 마을공동의 목기제기를 준비하여 명지아파트에 보관하여 사용한다.당산제 7일 전에 당산 주변과 마을입구, 제관 등의 집을 정결히 하고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기운 금줄을 펴서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당산제 진행순서는 당일 오전 9시에 길놀이로 할아버지당산에 이르러 제를 지낸 후 다시 길놀이로 할머니당산에 와서 11시경에 제를 지낸다. 제관과 통장단이 협력하여 제물을 진설한 후 유교시으로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강신-참신-초헌-독촉-개밥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하며, 음복은 당산제 이후 주민 모두가 모여 떡국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대신한다.광주시립민소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문산당산제는 음ㄺ 정월 7일이나 8일경에 주민들이 모여서 그해의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등을 뽑으면서 시작되었다. 제관은 엄격한 법도에 의거 산고(産故)나 상(喪)을 당하지 않았고 3년 이내 성주를 하지 않은 남자를 선정하며, 제 지내기 3일 전부터는 비린 음식을 일체 먹지 않으며 화장실만 다녀와도 찬물로 손발로 씻거나 목욕을 하는 청결함을 유지하며 부벙한 일이나 장소에도 가지 않고 집안과의 상면도 피했다.당산제의 비용은 마을주민 모두의 정성을 모은 인구전으로 충당하였으며, 제물은 1월 12일 양동시장을 이용하며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은 성격이 달라 각각 따로 구입하낟. 제물에 쓸 물건 값은 깍지 않으며 제기는 매년 사기그릇을 구입하여 제가 끝난 뒤 화주에게 주었다.주요 구입물품은 돼지머리, 삼실과, 제기, 소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등이며 제주(祭酒)는 미리 담근 청주를 쓴다.제물 준비를 할 때에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입에는 입마개를 했으며 음식의 간을 보지 않는다.화주와 제관 등은 당산제 전날 당산 주변과 마을입구, 각자의 집 안팎을 정결히 하고 13일에 큰 무등 등에서 파온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기운 금줄을 펴서 잡인의 출입을 막았다. 당산제의 순서는 할아버지당산에서 14일 자정쯤에 제를 먼저 지낸 다음, 닭이 운 뒤에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올린다.할아버지당산은 당산의 성격이 강해 금기사항이 많은데 그중 당산제의 제물도 가려서 비린 생선류는 일체 쓰지 않는다. 화주집에서 준비한 제물을 당산으로 옮길 때에는 횃불을 들거나 떡시루, 찰밥시루 등을 각각 든 18명의 남자들만 참여한다. 제물은 시루떡, 삼실과, 나물, 돼지머리 등을 진설하고 메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시인데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 강신-참신-초헌-독축-개반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된다.독축문의 내용은 당산에게 마을의 무사태평과 재앙을 막아주며 풍년이 들도록 기원한다. 축문의 구체적 문한은 중단된 지가 오래되엇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마을 앞 할머니당산에서 따로 준비한 제물로 진설을 하는데 할아버지 당산에 비해 제물도 생선류가 추가되어 다양하고 넉넉하며 풍물도 흥겹게 친다.할머니당산의 진설과 제의 절차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나 시작과 끝부분에 풍물이 있는 점만 다르다. 당산제가 끝난 뒤 15일 오전 중에 당산제 때 준비한 제물의 음복을 겸하여 마을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목청계를 열어 그 해의 품삯이나 공동관심사 또는 머슴의 새경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당산제가 끝난 15일부터는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마당밟이를 하였는데 이때 거두어진 돈과 곡식 등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사용하였다.당산제 후 집집마다 일정량의 볏짚을 내어 마을 안 사거리에서 줄을 드리는데 과목나무에 3합의 줄을 걸고 50미터쯤 되는 큰 줄을 만든 다음 마을을 양지와 음지로 편을 갈라 풍년을 기원하는 외줄다리기를 2월 초하루에 실시했으나 이제는 보기 힘든 민속이 되어 버렸다. 『광주의 상잔제』(1993)
    더보기
  • 충효당산제(忠孝堂山祭)
    충효당산제(忠孝堂山祭)무등산 북쪽 자락에 있는 충효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석저면(石底面) 지역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 성안처럼 되어 있어 '성안' 또는 '성내(城內)'마을로 불리다가 조선 22대 정조 때 김덕령 장군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 하여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이 하사(下賜)되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석곡면(石谷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담양군 남면(南面), 1957년 광주시 충효동, 1998년 석곡동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충효마을의 성촌 시기는 450여 년 전으로써 대부분의 주민이 충장공의 후손들이 광산김씨이기에 마을 입구의 충장공 비각과 취가정 등 충장공과 관련된 유적도 잘 관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충장공의 탄생 설화를 안고 있는 430여 년 된 왕버들 3그루는 2012년 10월 5일 천연기념물 제539호로 지정되었다.충효당산제는 마을이 생긴 이래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음력 정월대보름에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당산제를 모셔왔으나, 많은 주민들이 광주시내로 이주하고 젊은이들은 미신이라 하여 참여하기를 꺼려해 근래에는 구색만 갖추어 할아버지당산에만 모시고 있다.할아버지당산은 모정 곁의 수령이 500여 년 되는 귀목이었으나 오래전 벼락을 맞은 후 새로 가지를 친 것이라고 한다.매년 정월 초 마을 연장자로 순으로 제관 3, 축관 1, 집사 4인이 선출되면 이들은 제를 모실 때까지 금기사항을 지킨다. 특히 화주는 곶은 데를 피하고 부부 잠자리 등을 하지 않는다. 제비는 마당밟이로 거둔 성금을 모아 마련한 동답(洞畓)에서 나온 것으로 충당한다. 제물은 13일에 집사와 부녀회원이 목욕 후 재래시장에서 값을 깍지 않고 제물(미역, 김, 가조기, 삼실과 등)을 구입하며, 제기는 목기로 마을에 보관하여 사용한다.14일에는 주민들이 각 가정과 마을 안팎, 마을공동우물 등을 깨끗이 청소하고 공동우물에 그릇에 촛불을 담아 띄워 정화시키며 제물을 부녀회원집에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간이나 맛을 보지 않고 마련한다.당산제 당일에는 마을 입구, 당산, 제관, 축관집에 왼손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으며, 저녁 9시경 할아버지당산 앞에 모닥불을 지피고 농약대가 화주댁을 시작으로 마을 공동샘, 할아버지당산 순으로 풍물을 친 후 음식을 진설하고 당산제를 지낸다.제물 운반은 남자들이 흰옷과 흰장갑 착용 후 부녀회원집에서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제물을 머리에 이고 운반하여 진설한 후 초헌-메 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 순으로 이루어지며, 축문은 예전 것이 길고 어려워 짧게 줄여서 사용한다.소지는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소지 후 동민소지를 올리고,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약간씩 덜어 흰 종이에 싸서 묻고 돌로 눌러 놓는다.제물 중 돼지는 한 마리를 잡아 머리는 제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당산제 후 삼우날 마을 주민들이 화주집에 모여 제물과 돼지고기를 나누어 먹고, 그 뼈는 땅에 묻는다.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충효당산제는 정월 3일~5일 경에 마을회의에서 그 해의 운세를 점쳐보고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사람 중 연장자를 우선하여 제관 3인, 축관 1인, 화주 1인, 집사 4인 등을 뽑으면서 시작된다. 제관들은 제를 모시기까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는데 특히 화주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궂은 곳을 다니지 않으며,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해서도 안되고 대·소변을 보면 찬물로 목욕을 해야하기 때문에 먹는 음식을 줄이기도 하였다.제비(祭費)는 마을 공동답(共同畓)이 있어서 수확된 쌀로 충당했으나, 1957년 충효리가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공동답을 팔아 마을 공익사업에 사용한 후부터는 『지붕머리돈』이라 하여 한마지기의 동답(洞畓)을 다시 마련하여 당산제의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13일이 되면 화주와 집사가 목욕재계를 하고 양동시장에 나가 배석, 시루, 그릇 등 제기와 미역, 김, 가조기, 삼실과 등 제물을 일괄 구입하는데 값을 절대로 깍지 않고 지불한다. 제사에 쓰일 돼지머리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사용하며 나머지 부분은 당산제를 지낸 후 삼우날 마을 사람들이 화주집에 모여 나누어 먹는다.14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각 가정과 마을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화주집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한다. 제물 장만에 사용되는 물은 전날 저녁 동네 청년들이 마을공동우물을 모두 펴내고 깨끗이 청소하고 난 후 새로 솟아 오른 물을 14일 첫 새벽에 길어다 쓴다. 마을 사람들도 조상들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화주가 제물을 준비할 때에는 머리에 흰 수건을 스고 입은 마스크로 가리며 간을 안하고 맛도 보지 않는다. 상에 올릴 떡은 동답(洞畓)에서 수확한 쌀로 만든다. 또한 마을입구와 당산, 제관, 화주댁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저녁 9시경 할아버지당산 앞마당에 모닥불을 지피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농악대를 구성하며 서로 가락을 맞춰 보고 굿을 준비한다. 농악대는 제를 모시기 전에 굿을 치는데 화주댁을 시작으로 마을 공동샘, 할아버지당산, 충효초등학교 순으로 진행된다. 그동안 마을 사람 중 궂은 일이 없었던 남자들은 흰옷과 흰 장갑을 착용하고 화주댁에 모여 제물을 운반하며 당산제 준비를 서두르는데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운반한다. 충효마을 당산제에서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따로 제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자정 무렵이 되면 농악대가 할머니당산을 할아버지당산으로 모셔 오면 운반해 놓은 음식을 진설하여 당산제를 시작한다.제는 진설-초헌-메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축문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이 너무 길고 어려워 짧게 줄여서 사용하고 있으며, 소지는 축관이 먼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소지를 드리고 나면 제에 참여한 제관, 농악대, 연장자 순으로 동민소지를 올린다. 지신을 달래기 위한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약간씩 덜고 돼지머리에서 코, 귀, 입술을 떼어내 흰 종이에 싸서 묻는데 짐승들이 파먹지 못하도록 돌로 눌러 놓는다. 이로써 충효마을 당산제의 모든 절차가 끝나게 된다.다음 날 아침에는 마을 주민 모두가 화주집에 모여 제를 지내고 남음 음식과 마을에 잡았던 돼지고기를 먹으려 흥을 돋은 후 마당밟이를 한다. 『광주의 당산제』(1993)
    더보기
  • 용전당산제(龍田堂山祭)
    용전당산제(龍田堂山祭)용전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우치면(牛峙面) 지역으로 풍수지리상 마을의 지형이 배가 흔들리는 형국이라 하여 해유로 불리다 어느 해 홍수가 있은 후 물이 흔한 마을이란 뜻으로 낙촌(洛村), 용전(龍田)이라 불리게 되었다. 1957년 광주시 우치동에 편입되었다 1998년 9월 21일 건국동에 통폐합되었다.용전마을의 성촌 시기는 약 300여 년 전 진주정씨(晉州鄭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금은 주로 농업과 하우스 농사(묘목, 원예, 딸기, 참외, 고추 등)를 하고 있다.용전마을은 마을 중앙의 할아버지당산과 마을 아래쪽 할머니당산에 매년 음력 정원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일제시대 노남용(소작회의 회장) 씨에 의해 당산나무가 베어진 후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가 20여 년 전부터 옛 용전장터 자리에 있는 왕버들나무에 제관 3명(노인회장, 용전들노래보존회장, 장년회장 등)과 집사 2명을 정하여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제비(祭費)는 전년도 마당밟이를 통해 모은 자금과 북구청 지원금으로 준비하며, 제물은 삼실과, 나물(간을 하지 않음), 돼지머리, 포, 떡 등을 준비한다.14일 오전에 마을입구와 당산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목마다 뿌려 부정을 막으며, 제의는 유교식으로 진행한다.제관은 백색 한복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며, 제물은 부녀회에서 마련하여 진설한다. 현재 제기는 일회용 접시를 사용하고 있으나 추후 마을제기를 마련할 예정이며, 당산제에는 제관, 화주, 성인남자, 농악대만 참여하며 소지는 마을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진행된다.헌식은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땅에 묻으며, 참가한 사람 모두 음복한 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당밟이를 집집마다 한다.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용전당산제는 정월 14일 밤 자시(子時)에 모셨다. 제관은 정월 초 닷 세날 마을회의에서 아들이 많고 학식이 있는 어르신을 제관과 축관으로 정하고 화주는 깨끗한 사람으로 뽑았다. 제비(祭費)는 마을자본으로 나오는 이자로 충당했으며 제물은 삼실과, 나물, 돼지머리, 밥, 떡 등을 준비했다. 제상에 올릴 나물에는 간을 하지 않는다.14일 오전에는 마을입구와 당산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목마다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밤 10시쯤 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나발을 불었으며 제관의 복장은 백색 한복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썼다. 화주집에서 장만한 음식들은 깨끗한 사람들이 당산까지 가지고 가서 진설을 하였으며, 마을제기가 따로 있어 목청에 보관해 두었다 사용하였다. 한밤중에 제를 지내므로 화톳불을 피우는데 거기에 쓰이는 장작은 각 가정에서 거두어서 사용했다.돼지머리의 위턱은 할아버지 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진설하며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에는 농악대, 제관, 축관, 화주와 성인남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소지는 마을 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하며 헌식은 할머니당산에 헌식터가 있어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땅에 묻는다. 그리고 참가한 사람 모두가 차려진 음식을 음복한다. 당산제가 모두 끝나면 나발을 불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다음 날 마을에서는 마당밟이가 시작되는데 동네 공동 샘을 시작으로 당산나무를 거쳐 마을로 들어와 집집마다 굿을 친다. 그리고 정월 25일이 되면 이장선출 및 올해의 품삯을 정하는 마을회의를 연다. 『광주의 당산제』(1993)
    더보기
  • 왕버들 기원제
    왕버들 기원제왕버들 기원제는 광주 충효동 왕버들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기념하고 충효동 왕버들의 무병장수와 마을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기 위해 충효동당산제추진위원회에서 개최한다.2012년 10월 13일 광주충효동왕버들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축하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례와 기념음악회를 처음 개최하였으며, 2012년 11월 충효동왕버들보존회 설립하고 왕버들 기원제의 지속적인 개최를 의결하였다.왕버들 기원제는 진설→풍향→강신→참신→초헌→독촉→아헌→종헌→사신→음복→헌식순으로 진행된다. 특히 2013년 기원제에서는 김덕령 장군의 억울함을 해원하기 위한 상징적 의식으로 해원제를 함께 개최하고 소원지 붙이기 등의 행사 진행으로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였다.왕버들 기원제는 마을의 화합을 이끌어 내고 천연기념물인 충효동 왕버들의 보존관리를 위한 대책을 고심하는 기회를 가지며 관광객과 지역주민들에 소통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북구청 문화관광과 제공』
    더보기
  • 평촌마을 세시풍속놀이
    평촌마을 세시풍속놀이평촌마을은 닭뫼, 동림, 버성골, 담안, 평모 등 다섯 마을이 모여 이루어졌으며, 빼어난 자연경관(광주호 호수생태공원과 증암천 등)과 풍부한 문화관광자원(평촌도예공방, 장승과 솟대, 무돌길, 담안마을 돌담 등)으로 2005년 광주시 제1호 건강장수마을, 2013년 국립공원공원단의 '명품마을'로 각각 지정되었다.예부터 우리나라 전통농경사회에서는 정월을 '노달기'라 하여 농민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다양한 세시민속놀이를 즐겼다.평촌마을도 오래전부터 정월에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당ㅅ나제와 세시민속놀이를 행하여 왔으나, 많은 주밀들이 광주 시내로 이주하고 농업이 현대화되면서 당산제는 지내지 않게 되었으며, 세시민속놀이도 점차 잊혀 가고 있었다.이를 안타깝게 여긴 평촌마을 사람들이 마을 복지기금과 북구청의 지원을 받아 2008년부터 선조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는 다양한 세시민속놀이와 전통문화공연을 개최하여 도시민들과 어린이들에게 세시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주요 행사내용으로는 연날리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쥐불놀이, 소원지 쓰기, 달집태우기 등이 있으며, 문화공연과 정월대보름 음식(오곡밥, 나물)도 준비하여 행사에 참여한 시민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를 개최함으로써 우리 지역의 사라져 가는 전통의 맥을 잇고 찾아가 머물고 싶은 행복공동체를 조성해 가고 있다.
    더보기
  • (1)사라진 민속놀이 - 금곡마을 당산제, 대촌동 당산제, 중외마을 당산제
    - 금곡마을 당산제금곡마을에서는 해방 이전까지 당산제를 모셨으나, 지금은 모시지 않고, 당의 형태만 남아 있다. 금곡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모시면서 마을의 무병과 안녕, 자식의 성공, 출산 등을 기원했다. 당산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할아버지당산(큰당산), 큰할미당산, 작은할미당산(꾀꼬리당산) 세 곳에 모신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 가운데 있는 귀목나무였으나, 베어지고 그 후 이팝나무를 심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큰할미당산은 논 가운데의 들돌인데, 지금은 없어졌으며, 작은할미당산은 남근 형태의 입석으로 현재는 삼괴정 옆으로 옮겨 놓았다. 정초에 마을 회의를 통해 제관, 축관, 화주를 뽑는데, 대개 연장자가 맡게 된다. 제일 당일에는 마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그리하여 제의시간이 되면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돈 뒤에 진설-헌작-재배-독축-소지-헌식-음복 순으로 제의를 거행한다. 제가 끝난 뒤에 장만한 음식으로 동네잔치를 벌이며 즐겁게 어울린다.- 대촌동 당산제대촌동은 1990년까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당산제를 모셨다. 원래 7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다가 나중에는 할머니당산이라 불리는 입석에만 모시다가 그나마 신도시 건설로 모시지 않는다. 옛 삼소지면 사무소터 앞에 당산나무 2그루가 위치해 있는데, 이 당산을 일러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당산이라 부른다. 수종은 푸조나무,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3백년 가량 된다. 그리고 3기의 입석 중 1기의 입석만이 마을 앞 공원 부지에 남아 있다. 정월 초 첫 뱀날에 마을회의를 열어 생기복덕이 맞고 정결한 사람으로 화주, 제관, 축관 각 1명씩을 선출한다. 이렇게 뽑힌 사람은 부정한 곳의 출입을 삼가는 등 청결과 근신을 해야 하며, 특히 화주는 부정한 일이나 상을 당한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삿갓을 쓰며, 제물 구입 시에는 값을 깍지 않는다. 제비는 과거 인구전으로 거출하다가 마을 기금으로 충당하였다. 1990년대의 제비는 약 20만원 소요되었다고 한다.정월 열사흗날이 되면 마을 골목에 금줄을 치고, 마을 곳곳에 황토를 뿌린다. 그리고 제일 아침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 당산제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는데, 밤 10시쯤에 화주집에서 준비된 제수를 가지고 나와 진설한 뒤 제를 모신다. 헌식은 진설한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어 지름이 30㎝ 정도 되는 항아리 안에 담는다. 이렇게 제가 끝나면 풍물을 울려 당산제가 끝났음을 알리고, 이 후 각 가정에서는 보름날 차례상을 준비한다.- 중외마을 당산제중외마을에서는 오래전에 당산제를 모셨으나, 지금은 모시지 않는다. 현재 마을 입구 도로 중앙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당산의 영험함을 믿기 때문인지 상여가 당산나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게 한다. 몇 년전 마을에 궂은 일이 있어 간단하게 제를 모신 적이 있다고 한다.
    더보기
  • (2)사라진 민속놀이 - 분토마을 당산제, 죽곡마을 당산제
    - 분토마을 당산제분토마을에서는 일제시대까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당산제를 모셨는데, 근래에 들어 부녀자들 중심으로 당산제를 다시 모시고 있다. 당산제는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2곳으로, 할아버지당산은 마을의 우산각 옆에 있는 수령 5백년 정도의 귀목나무이며, 할머니당산나무는 고사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당산제 준비는 정월 12일 경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친다. 황토는 마을 뒷산에서 퍼온 깨끗한 흙으로 마을 입구와 당산나무 근처의 길목에 뿌린다. 제물 장만에 쓰이는 비용은 제를 모시고자 하는 사람들만 돈을 내서 마련한다. 제물은 떡, 메, 대추, 곶감, 삼실과, 나물 등을 준비한다. 그리하여 정월 열나흗날 8시경에 할아버지당산에 가서 제물을 진설하고 제를 모신다. 제가 끝나면 제물을 조금씩 떼어서 당산나무 옆 개울에 흘려보낸 것으로 헌식한 뒤에 모여서 음복한다.- 죽곡마을 당산제죽곡마을은 과거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시경에 당산제를 모셨다. 제관 선정은 마을 총회에서 결정하는데, 유사 2명, 제관 1명을 가려 뽑는다. 제비는 마을 기금으로 충당하였으며, 제물은 돼지머리, 환육, 삼실과, 떡, 탕, 나무 등을 준비하였다. 금줄은 제일 일주일 전에 당산 주변에 치고, 금토는 당산나무 주변과 유사집 앞에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따. 제의는 진설-헌작-재배-소지-헌식-음복으로, 헌식은 제물을 조금씩 떼어 백지에 싸서 당산나무 옆에 묻고, 돌 3개로 누르고 그 위에 황토로 덮는다. 당산제를 모신 뒤에 집집마다 돌면서 마당밟기를 한다.
    더보기
  • (3)사라진 민속놀이 - 문산마을 당산제, 수곡마을 당산제, 신흥마을 당산제, 치촌마을 당산제
    - 문산마을 당산제문산마을은 1991년 문흥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사라졌으나 근래 들어 할머니당산에서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문산마을 뒤쪽에 위치한 할아바지당산에서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문산마을 뒤쪽에 위치한 할아버지당산은 둘레가 열두아름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는데, 8․15 해방 전 태풍으로 인하여 밑둥이 부러진 뒤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당산은 과거 문산마을 입구였으나 지금은 명지아파트 입구에 서 있으며, 그 주위로 여섯 그루의 나무들과 우산각이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순에 그해 생기복덕이 맞고 깨끗한 사람으로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등을 가려 뽑았으며, 제비는 인구전으로 충당하였다. 제물로는 할아버지당산에 비린 생선류는 일절 올리지 않고 조용히 모신 반면에, 할머니당산에는 이를 가리지 않고 온갖 제물을 올려놓으며, 풍물도 흥겹게 쳤다.1998년부터 음력 정월 대보름에 할머니당산나무에서 문산당산축제가 개최된다. 제주양시 문중을 중심으로 동사무소와 유관기관, 주민대표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당산제, 풍물놀이, 외줄다리기 등이 행해진 가운데, 주민들 간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수곡마을 당산제수곡마을에서는 일제 말까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당산제를 모셨다. 당신은 귀목나무로 마을 앞과 뒤 2곳인데, 아랫당산, 윗당산으로 불리웠다. 현재 윗당산나무는 고사했고, 아랫당산나무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수령이 200여 년 된다. 제관은 정초에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1명, 헌관 1명, 축관 1명 등 3명을 가려 뽑았다. 화주는 마을입구, 당산주변, 화주집 앞, 샘 주변에 금줄과 금토를 거쳐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제물은 돼지머리, 과실, 채소 등 간단한 것으로 진설하며 비린 것은 절대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 신흥마을 당산제신흥마을에서는 6․25전까지 매년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당산제를 모셨다. 마을안 옹기가마 옆에 있는 느티나무를 할머니당산으로 모시고 지내왔으나, 땅주인이 천주교 신자여서 당산나무를 베어 버려 입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모시면서 마을을 평안하게 하고 풍년을 빌며 옹기그릇도 잘 구어지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이 마을이 폐촌됨에 따라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입석을 기증하여,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치촌마을 당산제치촌마을에서는 1960년대까지 매년 음력 이월 초하룻날에 독당산에서 당산제를 모셨다. 독당산은 마을 입구 죄측에 위치한 입석으로, 높이 110㎝, 두께 45㎝, 둘레 195㎝인데, 오룡동에 공업단지가 생기면서 없어졌다. 제관은 마을의 연장자인 촌장이 맡았으며, 제물은 돼지머리, 시루떡, 삼실과, 메, 탕, 향, 초, 제주 등을 올린다. 제차는 유교식이며, 제의 시작과 끝에 풍물을 친다. 당산제가 끝나면 그 전날 했던 줄다리기 줄을 입석 아랫부분부터 감아서 '당산 옷 입히기'를 한다. 독당산에서 옷입히기가 끝나면 마을 뒤 나무당산나무에서 준비한 제물로 다시 당산제를 모신다. 그리하여 제가 끝나면 풍물패는 샘굿을 친 뒤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당밟기를 하였다.  
    더보기
  • (4)사라진 민속놀이 - 주룡마을 당산제, 어운마을 당산제, 해산마을 당산제, 용호마을 당산제, 지야마을 당산제, 신촌마을 당산제
    - 주룡마을 당산제주룡마을에서는 일제시대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시경에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마을 뒷산 고갯마루에 있는 소나무 3그루로, 2그루는 여자나무라 불리고, 여자나무 사이에 작은 남자나무가 있었으나, 20여 년 전에 고사하고 없다. 당산의 크기는 나무둘레 3m, 높이 15m이다. 정월 11~12일에 마을 회의에서 깨끗한 사람으로 유사를 정한다. 정해진 유사는 그로부터 궂은 데를 피하며, 매일 찬물로 목욕하는 등 여러 가지를 금한다. 제비는 돈이나 곡식을 집집마다 거출하였으며, 제기는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한다. 제물은 유사집에서 준비하며, 금줄과 금토는 젊은 사람들이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에 한다. 제의 시간이 되면 제관이 제물을 들고 가고, 풍물패가 뒤를 따른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하며, 헌식은 당산 옆에 땅을 파고 돼지머리, 명태를 일부 떼어 백지에 싸서 묻는다.- 어운마을 당산제어운마을은 해방 이후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마을의 동쪽 구릉의 능선에 위치하며 당산 밑에는 우산각이 있다. 원래 4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서 할아버지당산이 2그루, 할머니당산이 2그루였으나 지금은 2그루만 남아있다. 정월 초순경에 마을회의를 통해 유사를 뽑는데, 깨끗하고 손 없는 사람으로 한다. 제비는 집집마다 갹출하는데 다른 신을 믿는 자와 상복 입은 자는 제외시키고 걷었다. 금줄과 금토는 3일 전에 당산과 유사집에서 하였으며 유사는 문 밖 출입을 금한다.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한다. 제물로는 떡시루, 감, 대추, 밤, 명태 등이다. 당산제는 제관 부부만이 당산에서 조용히 제를 모시고 돌아온다. 헌식은 명태를 백지에 싸서 당산 앞에 놓아두고, 감, 대추, 사과, 밤 등은 주변에 던진다.- 해산마을 당산제해산마을에서는 1970년대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마을 뒷산의 할아버지 당산과 마을 입구의 할머니당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월 10일경 마을회의를 통해 화주와 축관을 선정하는데, 깨끗하고 생기복덕에 맞는 사람으로 가려 뽑는다. 제비는 걸궁으로 마련하며, 제물은 돼지 1마리, 명태, 삼실과, 삼채등이며,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한다. 제수장만은 화주집에서 하는데 화주는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말을 안하며 간도 보지 않는다. 돼지는 머리만 올리는데, 위턱은 할아버지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쓴다. 금줄은 화주가 결정된 후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 화주집 앞 등에 치며, 금토는 제일 아침 일찍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고, 마을 사람들은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 열나흗날 저녁 9시경에 할아버지당산에 올라 당산 주위를 돌면서 굿을 친 후에 나발을 불어 제의 시작을 알리고 진설한다. 제의는 유교식이며, 헌식은 제물을 조금씩 떼어 백지에 싸서 당산나무 옆에 묻는다. 그리고 할머니당산으로 가서 다시 제를 모시는데, 이때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구경하고 음복한다.- 용호마을 당산제용호마을의 당산제는 일제시대 말 대동아 전쟁 때 일제의 억압 때문에 잠시 사라졌다가 해방 후부터 1993년도까지 모셨다. 이 마을의 당산은 세 곳으로 큰당산, 큰마누라당산, 작은마누라당산으로 불렸는데,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큰당산 하나뿐으로 마을 위쪽 18번지에 있다. 당산제는 음력 정월 첫 정일에 모셨는데, 만약 설날과 겹치게 되면 그 다음 정일로 미루어 모셨다. 제관은 집관, 축관, 유사 각 1명씩을 선정하는데, 특히 유사는 섣달 스무날 정도에서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가려 뽑는다. 금줄과 금토는 제일 일주일 전에 하는데 마을 입구와 당산 주변에 했다. 제의 시간이 되면 유사가 제물을 들고 당산에 가고 풍물패가 뒤따른다. 제의는 비교적 간단하며, 소지와 음복이 끝나면 당산 옆에 헌식을 하는데, 이때 진설된 음식을 조금씩 덜어 백지에 싸서 묻는다. 당산제가 끝나면 그로부터 10여 일간 걸궁을 치고 이월 초하룻날 총결산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한다.- 지야마을 당산제지야마을에서는 6․25 무렵까지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귀목나무로 두 개의 당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 곳만 남아 있다. 마을 서편에 위치한 할아버지다안나무는 6․25 때 불타버렸고, 할머니당산은 지산초등학교 안에 있다. 1월 초순경에 마을 회의를 통해 제관, 축관, 화주 각 1명을 뽑는다. 제비는 인구전으로 마련하며, 제물로 돼지머리를 구입하여 머리 위턱은 할아버지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차린다.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한다. 제의시간이 되면 풍물패를 구성하여 굿을 치며, 나발을 불어 베가 시작됨을 알린다. 제의는 진설-헌작-강신-독축-소지-헌식-음복의 순으로 진행되는데, 헌식으로 제물을 조금씩 떼어서 당산나무 옆의 헌식터에 묻고 나서 음복한다. 당산제가 끝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당밟기를 하였다.- 신촌마을 당산제신촌마을에서는 최근까지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시경에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은 마을 앞 개울가에 위치한 4백년 된 느티나무이다. 원래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이 있었는데, 마을 안쪽에 있던 할머니당산은 6․25 때 고사하자, 할아버지당산이 있는 곳에 화강암 자연석을 세워 할머니당산을 대신하고 있다. 마을회의를 통해 제관 3명, 축관 1명, 유사 1명을 정한다. 제의 시간이 되면 농악을 치며 마을을 돈 뒤에 당산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헌작-재배-독촉-소지-헌식-음복 순으로 거행한다.
    더보기
top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