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문산당산제(文山堂山祭)

문산당산제(文山堂山祭)


문산마을은 본래 광주군(光州郡) 오치면(梧峙面문)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산(文山)과 신흥(新興)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문흥리'가 되어 서방면(瑞坊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당산신은 할아버지당산나무와 할머니당산나무가 있다. 할아버지당산나무는 마을 뒤쪽에 둘레가 열두 이름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으나, 8·15 해방 전 태풍으로 밑 둥이 부러진 뒤 그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그 숲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문산공원 내에 할아버지당산나무 한 그루만이 홀로 서 있다.

할머니 당산나무는 수령이 4백여 년이 된 2그루이며, 느티나무공원 내에 있다. 할머니당산나무 사이에는 높이 136㎝, 너비 70㎝, 둘레 165㎝인 입석이 박혀 있다. 과거 당산 정면에 마을을 수호하는 2개의 입석(왼쪽 입석 개 형상, 오른쪽 입석 돼지 형상)이 더 있었는데 택지개발 당시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해방 이전에는 당산제를 지낼 때 줄다리기를 하고 줄을 이 입석에 감고 풍년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당산제는 마을이 택지개발사업으로 편입되면서 없어졌다가 1998년 제주양씨문중을 중심으로 한 무난당산축제 개최를 계기로 현재는 문산당산제추진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 즈음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문산당산제는 문산당산제추진위원회에서 음력 정월에 제관 4, 축관 1, 화주 1, 집사 2을 선정하면서 시작되며, 제비는 관심 있는 주민들의 참여로 마련하고 제물은 통장단이 당산제 3~4일 전에 말바우시장에서 가격을 깍지 않고 구입하여 당산제 전날 음식을 장만한다.

제물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쓸 제물(돼지머리, 삼실과, 제기, 쇠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청주 등)을 각각 따로 구입하며, 제기는 마을공동의 목기제기를 준비하여 명지아파트에 보관하여 사용한다.

당산제 7일 전에 당산 주변과 마을입구, 제관 등의 집을 정결히 하고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기운 금줄을 펴서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

당산제 진행순서는 당일 오전 9시에 길놀이로 할아버지당산에 이르러 제를 지낸 후 다시 길놀이로 할머니당산에 와서 11시경에 제를 지낸다. 제관과 통장단이 협력하여 제물을 진설한 후 유교시으로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강신-참신-초헌-독촉-개밥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하며, 음복은 당산제 이후 주민 모두가 모여 떡국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대신한다.

광주시립민소박물관에서 발간한 『광주의 당산제』(1993년)에 따르면 과거 문산당산제는 음ㄺ 정월 7일이나 8일경에 주민들이 모여서 그해의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등을 뽑으면서 시작되었다. 

제관은 엄격한 법도에 의거 산고(産故)나 상(喪)을 당하지 않았고 3년 이내 성주를 하지 않은 남자를 선정하며, 제 지내기 3일 전부터는 비린 음식을 일체 먹지 않으며 화장실만 다녀와도 찬물로 손발로 씻거나 목욕을 하는 청결함을 유지하며 부벙한 일이나 장소에도 가지 않고 집안과의 상면도 피했다.

당산제의 비용은 마을주민 모두의 정성을 모은 인구전으로 충당하였으며, 제물은 1월 12일 양동시장을 이용하며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쓸 제물은 성격이 달라 각각 따로 구입하낟. 제물에 쓸 물건 값은 깍지 않으며 제기는 매년 사기그릇을 구입하여 제가 끝난 뒤 화주에게 주었다.

주요 구입물품은 돼지머리, 삼실과, 제기, 소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등이며 제주(祭酒)는 미리 담근 청주를 쓴다.

제물 준비를 할 때에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입에는 입마개를 했으며 음식의 간을 보지 않는다.

화주와 제관 등은 당산제 전날 당산 주변과 마을입구, 각자의 집 안팎을 정결히 하고 13일에 큰 무등 등에서 파온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기운 금줄을 펴서 잡인의 출입을 막았다. 당산제의 순서는 할아버지당산에서 14일 자정쯤에 제를 먼저 지낸 다음, 닭이 운 뒤에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올린다.

할아버지당산은 당산의 성격이 강해 금기사항이 많은데 그중 당산제의 제물도 가려서 비린 생선류는 일체 쓰지 않는다. 화주집에서 준비한 제물을 당산으로 옮길 때에는 횃불을 들거나 떡시루, 찰밥시루 등을 각각 든 18명의 남자들만 참여한다. 제물은 시루떡, 삼실과, 나물, 돼지머리 등을 진설하고 메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시인데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 강신-참신-초헌-독축-개반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된다.

독축문의 내용은 당산에게 마을의 무사태평과 재앙을 막아주며 풍년이 들도록 기원한다. 축문의 구체적 문한은 중단된 지가 오래되엇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마을 앞 할머니당산에서 따로 준비한 제물로 진설을 하는데 할아버지 당산에 비해 제물도 생선류가 추가되어 다양하고 넉넉하며 풍물도 흥겹게 친다.

할머니당산의 진설과 제의 절차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나 시작과 끝부분에 풍물이 있는 점만 다르다. 당산제가 끝난 뒤 15일 오전 중에 당산제 때 준비한 제물의 음복을 겸하여 마을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목청계를 열어 그 해의 품삯이나 공동관심사 또는 머슴의 새경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당산제가 끝난 15일부터는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마당밟이를 하였는데 이때 거두어진 돈과 곡식 등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당산제 후 집집마다 일정량의 볏짚을 내어 마을 안 사거리에서 줄을 드리는데 과목나무에 3합의 줄을 걸고 50미터쯤 되는 큰 줄을 만든 다음 마을을 양지와 음지로 편을 갈라 풍년을 기원하는 외줄다리기를 2월 초하루에 실시했으나 이제는 보기 힘든 민속이 되어 버렸다. 『광주의 상잔제』(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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