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성와省窩 범기봉范起鳳<충신,의병>
형인 범기생과 함께 진주성 싸움에서 산화한 의병장 “성와省窩 범기봉范起鳳”

 

 범기봉(1557~1593)은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원유元有. 호는 성와

省窩. 본관은 금성. 범홍로范弘老의 둘째 아들로 북구 생용동에서 태어

났다.

  효성과 우애가 깊고 경서에 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국세가

어찌할 겨를이 없이 급박한 지금 어찌 관군이 사수하지 못한다고 하여 왜

적을 토벌할 도리를 잊을 수 있으리오.”하고, 형인 죽천 범기생范起生과

집안식구들과 함께 병기를 모아 김천일金千鎰 의병진에서 활약하였다. 그

는 장사 몇 명을 인솔하고 금령金嶺의 적을 참살하고, 안산安山을 거쳐

인천仁川에 이르니 기세가 위풍당당하였다. 강화도로 진을 옮겨 어선을

개조하고 왜적의 선박을 나포해 400여 척의 병선을 구축했다. 1592년 9월

9일 이를 이끌고 나가 한강 양회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 후 창의사倡義

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최경회崔慶

會, 고종후高從厚 등의 의병장들과 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

치는 데 많은 공훈을 세웠다.

 그리고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도장都將에게 말하기를 “호남

은 국가의 근본이요, 진주晉州는 호남의 근본이니 진주를 수비치 못하

면 어떻게 사직社稷을 보전하리오.”하고 바로 진주로 입성入城하여 성

문을 사수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그가 탄식하기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고 장렬히 싸우다

순절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에 록선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었

다. 1627년(인조 5)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그의 출생지인 복룡사에 제향 되었으나 1868년 훼철되

고, 1914년 그 터에 유허비와 용호재를 건립하였다.

1962년 1월에 증좌승지성와 범공순의비贈左承旨省窩范

公殉義碑를 광주광역시 북구생용동 129-1번지(모산 마을)

에 건립하였다. 비의 규모는높이 310㎝ 폭 61,5cm 두께31cm이다. 



출전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광주시사, 조선명신록, 북구 역사인물, 광주의 문화유적,

북구 문화유적조사보고서.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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