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병조참판兵曹參判 노윤발盧潤發<충신,의병>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이기고 산화한 “병조참판兵曹參判 노윤발盧潤發”

 

 노윤발(?~1598)은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시화是華. 본관은 광주. 선전

관 대방大邦의 아들로 고흥 출신인데 광주 북구 일곡동 절효사에 배향되

어 북구 인물로 선정하였다.

1585년 무과에 올라 1592년 임진왜란 때 주부로서 이순신 장군 막하에

들어가 군관軍官으로 1592년 당포해전에 참여 적의 병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1594년 2월 1일 그는 이경복李景福, 윤백년尹百年 등과 함께 도망군을

싣고 뭍으로 옮겨가는 배 여덟 척을 진영으로 붙잡아 왔다.

1594년 7월 2일 그는 흥양(고흥) 군관 이심李深 및 병선색리兵船色吏,

괄군색리括軍色吏 등을 붙잡아 오도록 군령을 받고 흥양에 가서 이들을

잡아 1594년 7월 26일 흥양의 색리와 감관監官을 붙잡아서 본영으로 들

어왔다.

1595년 4월 29일 그는 군사의 식용으로 미역 99동을 따가지고 진영으

로 돌아왔다.

1595년 7월 4일 진영의 군관들은 내기로 환각궁을 쏘았는데 그가 으뜸

이었다.

1596년 2월 30일 저녁에 송희립宋希立, 노윤발盧潤發, 이원룡李元龍

등이 술을 가지고 들어 왔다. 이순신은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

땀을 흘렸다.

 이상은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자료이다. 1598년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후의 대규모 해전으로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이었다.

1597년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한 일본은 11월 왜장 고니시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외교 등지에서 공격해 왔

다. 200여 척의 배밖에 보유하지못했던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 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달아

났다. 이순신은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

여 포위되었던 명의 장수인 진린을 구하고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

의 흉탄에 맞고 전사하였다. 그는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전사하였다.

 1605년 선무 원종공신 3등에 기록되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뒤에 광주의 절효사에 배향되었다.



출전 호남절의록, 광주읍지, 절효사지, 북구 문화유적, 난중일기, 충무공 전서.


-자미(紫薇)골 역사인물-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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