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고경리(1559~1609)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이척而惕. 호는 창랑滄
浪. 본관은 장흥長興. 진사 고계영高季英의 아들로 광주 북구 장등동 출
신이다.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광해군 즉위 후 집권한 대북 세력이 서인 학통을 공격하며 기축옥
사己丑獄事(정여립모반사건) 때 배후 인물로 알려져 투옥된 영의정 최영
경崔永慶의 죽음이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경에 빠져 있던 송강 정철鄭澈과 우계 성혼成渾이 사주해 죽였다고 성
상을 속여 관작을 추삭追削 하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님을 주장하는 상
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에서 선현으로 이름 높은 회재晦齋 이언
적李彦迪을 제외하였다는 이유로 대북 세력에 의하여 상소는 불태워지
고, 사림의 구호救護에도 불구하고 종신금고에 처했으며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사후에는 성균 생원 조봉대부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1709년(숙종 35)에는 광주에 건립된 운암사雲巖祠에 추배追配 되었다.
현재는 장흥고씨 창랑 문중에서 관리하는 용호재龍虎齋에서 매년 10월
제향하고 있다.
저서로 『창랑실적滄浪實蹟』이 있다. 그 내용은 목활자본 3권 1책으
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은 그의 유고만을 모아 놓은 것으로 부 1편, 시 1수,
소 2편, 서 2편, 잡저 2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2는 부록으로서 만시
13수, 제문 4수, 행장, 유사, 묘표, 묘지명, 운암사 봉안문, 춘추향 축문, 창
랑정 제영 3수, 소사전말, 증직사전말, 익묘대리시상언, 증직교지, 감회설
등이 있고, 권3도 부록으로서 세계와 연보 등이 있다. 권1의 창랑정입춘
부滄浪亭立春賦는 44세 입춘 때 지은 것으로 ‘자신의 생을 한 번 돌아보
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겠노라’는 다짐을 한 내용이고, 시문 1수인 「만종
질군수輓從姪郡守」는 종질인 고성후高成厚가 죽자 그를 애도하여 지은
작품이다. 「신구우계송강양선생소伸救牛溪松江兩先生疏」는 정여립 모반사건
때 배후 인물로 알려져 투옥된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이 정철과 성혼 때문
이 아님을 주장한 글이고, 계자서戒子書는 아들을 훈계하는 글이다.
「답신상사응순서答辛上舍應純書」는 그의 나이 50세(1608)에 쓴 것으로 당
시의 교유 인물인 성재省齋 신응순辛應純의 편지글에 답장한 것이고,
잡저 중의 「양심구방심의養心求放心疑」는 ‘양심養心’과 ‘구방심求放心’
가운데에서 ‘구방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함을 보여주며, 또한 ‘경敬’을 강조한다.
『창랑실적』은 16세기 말 정치사의 구도 속에서 호남의 한 유생이 어
떠한 행동을 보여주었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로써, 특히 기축옥사를 연구
하는데 활용될 수 있겠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해군일기, 대동야승, 매산집, 북구 역사인물,
북구 문화유적, 광주읍지.